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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육쌍둥이/쵸로오소 2020. 4. 25. 01:20
1. 처음은 오소마츠였다. 중학교로 올라간, 중1의 형에게 변화가 생긴 것이 시초였다. 형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이불에서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에 옆에서 고함을 지르고 뺨을 때려도 안 일어나더니, 점심 때쯤에야 비척비척 일어나 밥 한 두숟갈을 떠먹고 도로 홀리듯 잠에 들었다. 방바닥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린 오소마츠형을, 그때까지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스럽게 잠이 많네- 하고 넘겼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형은 병든 닭처럼 굴었다. 겨우겨우 끌고간 학교에서는 내내 잠만 퍼잤다고 한다. 수업시간에는 자더라도 쉬는시간이나 급식시간에는 반드시 일어나던 전과 달리 그저 하루 내내 잠으로 보냈단다. 엄마는 그때서야 오소마츠형을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가 말하길, 클라인-레빈 증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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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초.육쌍둥이/쵸로오소 2020. 4. 25. 01:19
개그만화의 등장인물이 역경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탱크 안에 든 여분의 산소를 나타내는 바를 내려다보며, 쵸로마츠가 생각했다. 그러니까, 고통이나 불행 없이도 남을 웃길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느냔 말이다. 물론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약 그런 방법이 있다면 연료탱크도 산소탱크도 바닥을 보이는 우주선에 버려진 자신이 불쌍하므로 있어도 없는 셈 칠 것이다. "-이거 뭔데?!" 이번에는 쥬시마츠도 없다. 저 도움 안 되는 장남새끼와 단 둘인 것이다-물론 바보가 둘 있다고 백지장 2장만큼의 효력을 발휘하지는 않겠지만-. 이 텅 빈 무중력 공간에. 쵸로마츠는 조종석의 스크린에 올라온 그래프들을 열심히 눈으로 흝었다. 우주선과 지구의 거리는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보다 크다. 여기에서 집까지 갈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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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이면.육쌍둥이/쵸로오소 2020. 4. 25. 01:19
1. 왜? 문득 뒤를 돌아보며 묻는 오소마츠에 쵸로마츠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리숙한 얼굴에는 궁금증이 한가득 담겨있다. 어깨너머 하늘은 우중충한 낯색을 하곤 투명한 빗방울만 땅바닥에 쏟아내고 있다. 바닥에 빗방울이 부딫히고 조각나고, 물줄기가 되어 흐르는 소리가 침묵을 메운다. 방금 불렀잖아.안 불렀는데?에, 그랬어? 잘못 들었나 봐. 도로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금 허공을 가르는 빗방울들을 바라본다. 흔들흔들, 창문에 걸터앉은 발을 굴러보다가 발끝을 오므리며 까르르 웃는다. 퍽 재미있다는 모양새였다. 쵸로마츠는 그 뒷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손 안의만화책에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만화책 속에, 짙은 명암으로 표현된 주인공은 열세인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뭐?..뭐가?방금 불렀잖아, 오소마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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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육쌍둥이/쵸로오소 외 2020. 4. 25. 01:16
[오늘 저녁에 먹고싶은 거라도 있는가, 허니?] 하얀 화면 위 딱딱히 나열된 까만 글자들을 바라보던 이치마츠가 눈살을 찌뿌렸다. 그 놈의 허니, 허니. 문자에서마저도 놓치질 않는다. 허니, 아니면 달링. 마이 엔젤은 또 어떤가. 절레절레, 고개만 겨우 저은다. 도대체가 정이 가질않는 호칭들이다. [일단 그 입부터 닥쳐.] 짧지도 길지도 않은 문자 한 통을 보내놓고는 탁자에 곱게 앉은 고양이의 턱 밑을 쓰다듬는다. 하루종일 한게 많아 곧 쓰러질듯 싶다. 우선은 오늘 밥을 해먹었고, 또 밖에 나가 고양이 사료를 사왔으며, 또 밥을 해먹었고, 조금 무겁게 절 눌러오는 죄책감에 세탁기를 돌리고 저가 지금껏 먹은 식기류를 설거지했다. 어차피 곧 집으로 돌아올 카라마츠가 도맡아 설거지를 할 것이 뻔했지만은, 매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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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빌의 절벽.육쌍둥이/쵸로오소 2020. 4. 25. 01:15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그 말 외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만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이 졸려 잠에서 깨는 느낌은 유쾌하지 못하다 못해 엿같았으니까. "아, 깼군요." 하고, 목줄을 잡아당겨 억지로 잠에서 깨운 주제에 평온한 어조로 저리 말하던 노인네의 목소리가 아직껏 생생했다. 물론, 그때 본 네 눈과 비교하자면 한참은 흐린 기억이지만은. 어딘가 초점이 비틀린 눈. 내 얼굴을 본떠 만든 듯 똑닮은 얼굴. 기이하리만치 이질적인 그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살아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산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너는 잠시 간의 침묵 후, 짜여진 각본을 따라 움직이는 인형처럼 서서히 내게 눈의 초점을 맞췄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작스레 밀려오는 정체모를 떨림에 몸을 움츠렸었다. 알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