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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ff at pourville.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그 말 외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만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이 졸려 잠에서 깨는 느낌은 유쾌하지 못하다 못해 엿같았으니까.
"아, 깼군요."
하고, 목줄을 잡아당겨 억지로 잠에서 깨운 주제에 평온한 어조로 저리 말하던 노인네의 목소리가 아직껏 생생했다. 물론, 그때 본 네 눈과 비교하자면 한참은 흐린 기억이지만은.
어딘가 초점이 비틀린 눈. 내 얼굴을 본떠 만든 듯 똑닮은 얼굴. 기이하리만치 이질적인 그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살아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산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너는 잠시 간의 침묵 후, 짜여진 각본을 따라 움직이는 인형처럼 서서히 내게 눈의 초점을 맞췄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작스레 밀려오는 정체모를 떨림에 몸을 움츠렸었다. 알았던 것이다. 내가 그 순간 마주한 것이 세상에 다시없을 또라이의 눈이란 걸.
"말대로, 눈이 예쁘네."
이쪽이 할 소리였다. 예쁘다기보다는 사람 눈동자같지 않게 기이해서, 신기해보였단 것이 더 옳은 표현이었지만. 나는 네게 그 날 사들여져서,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수조로 옮겨졌다. 한가득 물을 받아들였을 때 느껴지던 전에 없던 청명감, 피부에 와닿던 시원한 감촉. 기분이 나빴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나를 보는 네 시선이 죽은 듯 멍했단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래. 네가 날 보는 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버릇처럼 동공을 움직이고, 수축하고, 확장시키며 날 관찰할 뿐이었다. 노인네의 손에 있던 이전에는 매여있는 기분이나, 계속되는 배고픔을 제외하고는 문제가 없었다. 정신적인 면에서의 문제는 없었단 것이다. 네게서 색다른 느낌의 고통을 경험한지 3일 째 되는 날, 견디지 못하고 물 밖으로 올라왔다. 너는 소파에 느긋이 기대앉아 전과 같이 나를 뜯어보고 있었다. 진저리가 나기 직전이었다.
"눈깔 좀 치워. 동물원 구경왔어?"
내 말이 직접적으로 들리지 않았더라도, 이제껏 관찰당한 시간이 있으니만큼 입모양만으로 알아먹으리라 확신했다. 너는 멍한 듯 눈을 깜빡이다가, 방금까지만 해도 텅 비어있던 눈동자 속에 파도처럼 웃음을 채워넣더니 수조로 다가와 창문의 잠금쇠를 풀어냈다. 강화유리로 된 창문을 무거운 듯 힘겹게 열어젖힌 네가 수조 안으로 고개를 드밀었다. 환한 목소리가 유리벽에 반사되어 수조 안을 가득 메웠다.
"방금 말한 거지!"
"..하?"
"더 말해봐. 되도록이면 아이우에오 부터 라리루레로까지 반복해서!"
또라이. 내가 너를 그렇게 인식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 날 하루 내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외웠고, 그 다음 날부터는 만세, 가위바위보, 고개 끄덕이기를 비롯해 수백여 개의 행동을 취했다. 너는 그 시간 내내 단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나를 바라봤다. 당시 내 눈에는 정말 미친놈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굴이 정말 비슷하다 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닮은지라, 내가 아니라 거울을 보더라도 내 얼굴을 조금의 오차없이 똑같이 볼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자리에서도 아닌 이리저리 자리를 바꾸어가며, 내게 동작을 달리할 것을 요구하며, 몇 분 간이나 같은 모습을 뚫어져라 보는 꼴은 정상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포즈를 취하는 것이 질려서, "뭐하잔 거야?" 하고 물어보면, "기다려 봐, 기다려 봐." 하고 너는 넉살좋게 웃으며 대응했다. 나는 혀를 차면서도 네 요구를 받아줬다. 유리벽 너머로 보던 얼굴을 직접 마주하자, 꺼림찍한 느낌이 거짓말처럼 가시다 못해 일말의 정까지 약간씩 쌓여가기 시작해서이다. 너는 내게 지나치게 유들했고, 네 목소리는 함께한 시간의 양과 맞지않게 지나친 친애를 담고있었다. 도저히 적대하고 미워할 수가 없는 태도였다. 그러니까, 좋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단 뜻이다.
아마 너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라고 생각한다. 나는 네 편안한 분위기에 녹아들듯 경계를 풀어가고 있었다. 누구든지 그랬을 터다. 너라는 사람을 미친놈이 아닌 마츠노 오소마츠라는 인간으로서만 알고 긴 시간을 함께했더라면 누구든지 간에 너에게 빠져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밤이면 다음날 아침을 기다리며 잠에 들었고, 아침이면 네 목소리와 함께 잠이 깨기를 바랐다.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네 목소리를 시끄럽다고 치부하면서도 끊기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네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네 수조에 온 지 딱 6일 째, 너는 나를 관찰하기를 그만뒀다. "한동안 못 올 거야." 하고, 평소의 5배는 되는 양의 어패류를 넣어주며 네가 덤덤히 말했다. 당황스런 마음에, "어디로 가는 거야?" 하고 묻자, 너는 그전과 다름없는 웃음을 짓고는, "심심할 것 같아?" 하고 물었다. 너없는 시간이 심심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너는 어디선가 물에 젖지않는 소재로 된 책을 한아름 가져와 수조 속으로 들이붓고는 떠났다. 내용은 가지각색이었다. 독서 역시도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으므로 너 없는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네가 이 방에 찾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꼬리를 달싹일 뿐이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던가, 하고 고심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네 요구에 충실히 따라줬고, 제대로 먹었고, 얌전히 있었다. 네가 내게 불쾌하단 기색을 보인 순간 역시 단 한 번도 없었다. 네가 내 수조가 있는 방에 찾아오지 않은지 4일 째 되는 날, 결론 내렸다. 너는 내게 흥미를 잃었다고, 이제 너는 나를 굶어 죽이거나, 팔아버리거나 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 날 밤 문이 열렸다. 얼굴 곳곳이 옅은 보라빛으로 물들어서는, 붉게 충혈된 눈을 한 네가 방 안에 들어오자, 수조 바닥을 박차고 올라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뭐야 너. 어디서, 아니, 그보다 왜-,"
"-맞았냐고?"
"..-그래."
"음, 그림을 못 그려서?"
이해가 안 갔다. 몸 구석구석이 파랗게 올라오도록 맞은 이유가 '그림을 못 그려서'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황당하단 내 얼굴을 알아봤는지, 너는 소리내 웃으며 손을 저었다. "농담이야. 웬 이상한 새끼한테 걸려서." 거짓말이 아닌 줄은 알았다. 네가 나를 보는 만큼 나 역시도 너를 보았으니까. 네가 나를 아는 만큼은 아닐 지언정 나는 너를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을 지적하기에는 나는 겁이 많았다. 되묻는 순간 네가 얼굴을 굳히며 이 방을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물음을 죽였다.
"그럼 그동안 그림만 그린 거야?"
"그렇지. 다 망했지만."
"못 그리게 생겼어."
"내가? 잘 그리는데."
"못 그린다며."
"따라 그리는 건 잘해."
그 날 밤에는 네 그림을 구경했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막을 열었던 마사초의 그림부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린토레토, 벨라스케즈 등의 사실주의 작가들의 것이든, 폴 고갱, 반 고흐, 클로드 모네 등의 인상주의 작가들의 것이든 간에, 네 그림은 책 속의 원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 붓터치의 각도, 길이, 심지어는 붓이 갈라지는 타이밍까지 비교해봤으나, 한 치 다를 바 없었다. 말 그대로, 똑같았다. 진짜 그림을 가져와 섞어놓으면 다시는 구분하지 못할 것 같았다. 클로드 모네의 'Cliff at pourville'가 아른거리는 유리벽에 가만 손을 댔다. 너무나도 똑같은지라 의심이 들어 물었다.
"원본 아니야?"
나는 몸값이 싼 편이 아니었다. 하기사야, 인어라니. 뭣모르는 늙은 촌어부도 수천억대의 가격을 불러댔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 나를 몇 분 둘러본 것만으로 산 너 역시 돈이 적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원본을 사와서 네가 그린 거라고 거짓말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너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뭐가 그리 웃긴지 큭큭거리며 유리창문으로 다가왔다. "비켜봐." 그 말과 함께, 너는 어둑한 바다를 가볍게 수조 위로 던져넣었다.
"-뭐하는 거야?! 젖잖아!"
"아니아니, 필요없으니까? 그거 가져. 젖어서 이상해지면 또 그려줄게. 아, 그때까지 다른 거 가지고 싶으면 말하고."
"다른 거라니, 그림?"
"응. 거기 있는 책에서라던가, 아는 게 있다면 다른 것도 좋아. 그보다, 아직도 그게 진짜같아?"
나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너는 유리에 고개를 걸치고는 빙그르르 웃음지었다. "그럼 됐고. 혹시 아침으로 먹고싶은 거 있어?"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의 블라인드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밤을 그만 아주 새버렸던 것이다. 망연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손 안의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묵직한 물을 헤쳐 붓자국이 말라 굳은 바다 위를 흝었다. 굳은 유화의 감촉은 생각과 달리 딱딱했다. 반들반들한 것도 같았고, 손톱으로 딱, 딱, 하고 긁어 떼어내고 싶기도 했다. 그냥 한 마디로, 생소했다. 누군가와 얘기를 하다가 밤을 새버린다던가, 유화가 그려진 캔버스를 손으로 만져본다던가, 책을 읽는다던가, 이토록 넓은 수조에 자리하게 된다던가-..
나는 정말이지 생소해서, 이제는 두렵기까지 한 그것을 올려보았다. 네가 기대어린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관심을 이토록 기다리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한 적 없다. 나는 수면 위로 올라와 가만히 손을 뻗었다. 너는 그것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말없이 내 손을 맞잡았다. 너무나도 쉽게 잡힌 푸른 손에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널 빠트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 거냐고.."
"넌 그런 강심장은 아니잖?"
다 안단 듯 구는 말투가 짜증났다. 그렇지만, 사실이라,
"..응."
수긍 이외의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기에, 나는 수면 아래 바다보다도 빛깔이 찬 그것을 힘주어 잡아보지도 못한 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그 후로도 잘만 흘러갔다. 너는 숙식을 전부 내 수조가 있는 방 안에서 해결했다. 내 방에 머무를 때면 너는 언제나 방 안을 뒹굴거나, 유리창문에 걸쳐서 나와 얘기를 나누거나, 그도 아니면 그림을 그렸는데, 대부분은 모작이었다. 특이한 점은 네가 옆에 그림을 두고 그리지 않았단 것이다. 너는 웬만한 명화는 전부 외우고 있었다. 궁금증이 들어 몇 개의 명화를 외우고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너는 고심하며 손가락을 연신 접어내리다가, "글쎄, 60개를 약간 넘으려나?" 하고 대답했다. 너의 '외운다'는 말 그대로 외움을 뜻했다. 이전에 본 클로드 모네의 모작과 같은 수준의 것을 같은 자리에서 60여개는 더 그려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미친놈들이 원래 좀 더 똑똑한가. 하기사야,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식으로 무언가를 외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나는 목소리에서 떨림을 지워내려 애쓰며 물었다.
"화가가 본업이야?"
"에, 아니. 본업은 이런 거 보러다니기."
"뭐, 그게 뭐야."
"음-.. 돌아다니면서 작품 보고, 괜찮은 거다 싶으면 사서 더 비싸게 팔고.. 아, 그냥 값나가는 거 사서 값을 올려 판다던가 하는 거?"
값 나가는 것, 하면 내가 떠올릴만한 것은 하나 뿐이다.
"여기에 온 지 꽤 된 것 같은데."
"아, 넌 팔려고 사온 거 아냐."
너는 들고 있던 붓을 까딱이더니,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쳐왔다. 어딘가 기쁜 듯한 웃음.
"가족이랄까."
그 말을 듣고서, 얼굴에 피가 쏠리는 느낌에 수조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너는 다시 붓을 고쳐쥐고 뒤돌아 서서 그리던 것에 열중했다. 미술서적 한 권을 집어 네가 그리고 있는 그림의 원본을 찾는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못'. 책에 나온 대로 탁한 청록색 물감이 만연한 그림이었다. 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붓을 내린다. 조금의 오차 없이 똑같다. 나는 이제 네가 미쳤을지언정 좋다고 생각했다.
너는 한 번 붓을 쥐면 8시간 정도는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려낸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서는,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 전혀 가늠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8시간에 걸쳐 반절 정도의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너는 그제서야 깨달았단 듯 급하게 내 식사를 준비했다.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너는 늘 장난으로나마 사과를 건넸다. 이쪽 입장에서는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하는 게 밥 때를 지키는 것보다 좋았으므로 정말 괜찮음에도 그러했다.
"사람이 잠은 안 자도 밥은 먹고 살아야 돼. 배고픈 건 서럽잖?"
막 완성한 데리야끼 볶음밥을 한 입 크게 물며 네가 물었다. "글쎄, 굶는다고 하기에도 애매하잖아. 밥 때를 조금 놓친 것 뿐이고."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너는 배시시 웃으며 물고 있던 젓가락을 내렸다. "다음에 올 때 맛있는 거 사올게, 전복 스테이크라던가." '전복' 스테이크라. 나이에 맞지않게 인어에 대한 동심이라도 있는 건가. 이전부터 계속 해산물만 주는 것을 보면 정말 그런걸지도 모른다. 인어의 먹이로는 무엇이 좋을지 고민하는 오소마츠라-.. 나는 조개의 살을 발라내며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냈다. 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내가 해산물만 먹어야 한다고 누가 그랬어?"
"에? 그 노망난 할배새끼."
"아, 그 놈."
동심은 아니었나. 아니, 그 말을 의심도 없이 곧이곧대로 믿은 것부터가 순진하지만. 너는 당황한 눈치로 물었다.
"아냐?"
"아니 뭐, 아주 틀리진 않은데.. 뭐, 지금처럼 물 안에 있을 때는 조리된 음식이라던지 먹으면 곤란하긴 하지. 소화가 힘드니까."
"-에, 그러면 밖에 나가면 뭐가 틀려?"
"응. 나가면 다리가 생기지. 몰랐어?"
너는 내 말에 충격이라도 받은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날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불명의 소리를 지르며 물었다. "다리가 생긴다고-?!" 나름 귀여웠던지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너는 그런 건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고 말했다. 인어가 해산물만 먹을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는 의심도 없이 믿더니, 이런 상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니, 순수한건지 단순한건지. 내가 간만의 유쾌한 기분에 한바탕 웃어제끼고 있자, 너는 유리창문에 성큼 다가와 붙으며 물었다. "지금도 돼?"
"-지금은 안 되지 멍청아. 나가면, 이랬잖아."
"그러니까, 나가면."
"..뭐?"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너는 지나치게 밝은 얼굴로 창문을 열었다. 손을 아래로 힘껏 뻗는다.
"나오면 되는 거잖아, 안 돼?"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가? 잠깐, 그러니까, 무슨. 나간다고? 내가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건가 이새끼? 내가 말문이 막혀 망설이자, 너는 다시금 손을 뻗으며 나를 독촉했다. 아슬아슬 매달린 몸이 금방이라도 기울 듯 위태롭다. "뭐해, 빨리." 불안함에 눈을 굴린다. 동공에 든 네 손가락은 아직도 마디마디가 노란 멍으로 물들어 있다. 핑계를 찾자, 입은 저 혼자 거짓말을 잘도 지어냈다. "뭘 끌어올려주겠단 거야, 손이고 팔이고 성한 데도 없으면서. 가볍다고 착각했다가 큰 코 다치지 말고 치워." 너는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마냥,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 역시 내가 한 행동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것은 찬스라면 찬스이지, 마다할 것은 안 됐다. 나간다면 오랜만에 마른 기분을 느낄 수 있을 터였고, 도망칠 기회도 생길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서야, 나는 내가 도망칠 기회를 얻는 것이나, 네게서 벗어날 기회 자체를 무서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저 네게 머무르고 싶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상이 오래토록 이어지길 바랐다. 네 눈이 내게 머무르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이유를 묻지 않으면 좋겠다. 너는 뻗었던 팔을 거둔 채, 나를 까맣게 쳐다본다.
"넌 되게 쓸데없는 걱정 많이 한다니까?"
"-뭐, 기껏 배려해줬더니 한단 소리가 그거밖에 안 되냐?"
"아, 예이예이, 고맙습니다!"
태평스런 목소리가 창문으로부터 멀어지고 나서야 남몰래 무거운 숨을 뱉어냈다. 그것을 끝으로 다시 평화가 찾아오리라고 생각했다. 길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여유가 주어지리라 믿었다. 물론 내 예상이 맞을 가능성은 던져진 동전이 옆면으로 서는 것만큼이나 드문 일이었기에, 그것을 믿은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너는 그 날 이후로 다시 내 방을 드물게 찾았다. 5일 정도의 텀을 두고, 이틀에서 3일 정도 너는 규칙적으로 내 방에 들어오지 않는 날들이 있었다. 하루, 이틀, 하며 책을 쌓아 숫자를 세고, 네가 온 날이면 넷, 다섯, 하고 숫자를 세었다. 나는 네가 돌아올 줄 알면서도 네가 떠나는 날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다. 네가 여기에 목줄이라도 묶여서 정말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더래도 나는 네가 떠나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다. 나는 네가 다치는 걸 싫어했으니까.
떠난 네가 내 방으로 돌아올 때면, 언제나 네 몸에는 멍이 들어있었다. 가끔은 흰 천에 팔이나 다리를 동여매고 오기도 했다. 이유를 물으면, 너는 '부어서' 라고 대답했다. 물론 그것이 거짓말인 줄 알았고, 내가 알아챈 줄을 네가 알았을 것은 더 잘 알았다. 책에서 읽기로는 아마 그것은 탈골이나 골절을 치료할 때 쓰이는 방법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어찌됐든 간에, 약이나 휴식으로는 다 낫지 못할 부상이니 그런 꼴을 했겠지. 네가 많이 다쳤단 사실은 매한가지였으므로 크게 연연할 까닭조차 없었다.
내가 네게 다쳐온 사정을 물었을 때면, 그 날의 그 말도 안 되는 대답은 몇 번이고 반복됐다. "그림을 못 그려서", "오늘도 꽝이더라고", "응, 별로 안 예쁘게 그려져서". 수십 수백개의 대답. 똑같은 내용. 모두가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몇 번이고 확인했듯, 너는 그림을 잘 그렸다. 정확히는 모작을 정말 잘했다. 거짓말이라고, 진짜 이유를 알려줄 수 없기 때문에 하는 핑계라고 생각했다. 아마 오늘에 이르르기까지의 날들이 없었다면, 끝까지 그것이 어린애 눈속임같은 거짓말인 줄 알았을 것이다.
처음은 티비 속 아이돌과 흡사하게 생긴 얼굴의 여자였다.
"이게 그거야?"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수준의 미인이었던지라, 아닌 척 하면서도 여자를 연신 살폈다. 너는 역시나 웃으며 대답했다. "예쁘지." 어이없는 소리. 사람들 눈에 내 꼬리나, 눈이 조금 신비로워 보일 수는 있으나, 저렇게 자랑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할 정도는 못 됐다. 그럼에도 여자는 대충이나마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숨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만 갖다 팔지 그래?" 꼬리를 까닥이며 수조 구석에서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너는 조금 웃다가, 처음보다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질투나?" 장난스런 말투. 농담인 걸 알면서도 속이 무거워져 몸을 더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네 인간관계가 나로 한정돼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안 했지만은, 막상 눈으로 보니 감회가 색달랐다. 너는 질색이라는 듯 찌뿌린 여자의 얼굴을 보고 깔깔대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티나지 않는 한숨.
"아-, 됐고 됐고. 여기에는 술 없어. 나가자."
"너 좀 이상해."
"어디. 머리?"
"알면 좀 고칠래? 소름돋아."
"아하하~ 뭐 어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옛날에는 좀 똑똑하게 미쳤었지. 지금은 사리분별 못하는 또라이 새끼고."
"어딜 봐서?!"
"요즘 경매에 나오지 않는 걸 봐서? 딱 봐도 몸부터가 정상 아닌 걸."
그 말 그대로, 요즘 너는 자주 방에 머무르지 않았다. 즉슨, 많이 다쳤다는 소리다. 너는 목소리에서 웃음기를 지워냈다. 얼굴은 여지껏 웃고있으나, 네게는 정색이나 다름없는 태도였다.
"알아알아, 이제부터 슬슬 다시 일할 거니까?"
여자는 질린단 눈으로 널 노려보았다. 나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불안한 눈으로 너와 여자를 번갈아가며 연신 살폈다. 여자의 말이 모두 이유없는 비난같았고, 그것은 네게 차갑게 쏟아부어지고 있었다.
"일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맞아죽어 그냥. 썩을 동정."
"너무하네! 나 상처받아서 죽어버려?"
"그런 퇴물한테 맞고사는 쓰래기로 살 바에야 죽는게 낫지 않을까?"
발랄한 말투와 대비되는 딱딱한 목소리.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던 나에게는 더욱 더 날카로운 폭언. 수면 위로 올라가 말하고 싶었다. 뭐하는 새끼길래 죽으라느니 같은 소리로 너를 공격하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평소의 너였더라면 노려보든, 대꾸를 하든, 주먹질을 하든 간에, 어떠한 대응을 했을 것이다. 이상함을 느낀 것은 거기서부터다. 너는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저항 없이 그 말들을 그저 무기력하게 받아들였다. 여자가 싸늘한 시선을 무기 삼아 너를 노렸다. 너는 한참을 당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많이 처맞고 있잖아?"
추궁하고 싶은 마음마저 가실 정도로 힘없는 목소리였다. 여자도 그것을 아는지, 입을 다물고 잠자코 네 뒤를 따랐다. 그 이후로 그 여자가 내 방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너는 간간히 자리를 비우고도 맞고 오지 않을 때가 생겼고, 네 몸의 멍은 점점 보이지 않는 쪽으로 옮겨갔다. 네 얼굴이나 손, 팔, 목은 더 이상 푸르지 않았다. 대신 옷을 갈아입을 때나 목욕 전 보이는 맨살들에 새빨갛고 검은 멍들과 얇은 금들이 보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너는 등의 멍 때문에 제대로 눕지 못했다. 너는 다리의 자상 탓에 보폭의 크기가 줄었다. 너는 짐짓 보기에는 괜찮았다. 말투도, 표정도, 행동도 이전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너는 말라가고 있었다. 언젠가 네가 내게 주었던 캔버스의 유화와 같이. 아니, 어쩌면 진작에 말라있었을까. 그렇다면 넌 왜 그렇게도 말라가는 것처럼 보이나.
단정한 정장을 입은 중년남성이 방에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몇 주 후이다.
눈매가 사나운 그 남자는 광기가 제대로 든 눈을 하고는 날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수조 안으로 들어와 날 찔러죽일 것만 같은 표정이라서, 모서리에 붙어 몸을 웅크렸다. 열린 문으로 네가 들어오기를 바랐다. 이 인간이 누구든지 간에, 네가 오면 해결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는 창문에 몸을 걸치곤 나를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나도 보고 따라 그리겠군."
무슨 말인가 싶었다. 남자는 내가 듣든 말든 상관없단 듯 계속해서 씹어뱉듯이 속삭였다. 말 그대로 혼자만의 말이었기에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으나, 입모양으로 보였다. 빠른 속도의 욕짓거리 후 이어지는 나지막한 글자들.
"개패듯 때려죽여야 정신을 차리나."
-순간,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따라 그린다던가, 개패듯 때린다던가 하는 말을 들어서 떠올릴 만한 것은 너밖에 없었다. "그래서 많이 처맞고 있잖아?" 답지 않게 여리던 목소리의 울림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검고 붉던 멍, 다리의 자상, 그 이외에도, 아주 오래돼 보이는 것부터 최근에 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까지, 다양한 시간대의 다양한 크기, 다양한 형태의 흉들. 나는 물을 토해내고 수면 위로 올라갔다. 가득 숨을 들이마쉰다. 두려움에 떨리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목소리는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분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너야?"
"-나다."
얼굴을 일그러트리자, 남자는 비식 웃음지었다. 퍽 재밌단 듯한 표정.
"오소마츠, 그 놈을 괴롭힌 게 나다."
눈이 돌아갔다, 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 것이다. 나는 그의 내려온 자켓 자락을 쥐었다. 끌고 내려간다. 끌고 내려간다. 바닥에 처박는다. 얼굴에 부대끼는 공기방울에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지만, 내 손가락이 감싸 쥔 것은 놈의 목임이 분명했다. 조른다. 죽기를, 쥔 목에서 느껴지는 혈액의 박동이 멈추기를, 아, 잔뜩 숨막힌 얼굴. 왜. 익사라니 팔자 좋잖아. 그 표정 집어치워. 조른다. 죽어. 죽어. 1초라도 빨리 죽어버려. 성가셔. 버둥거리지 마.
남자는 몇 분을 더 죽기 직전의 게마냥 버둥거리다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남자를 수조 구석에 밀어넣고는, 반대 구석에 가 웅크려앉았다. 죽었을까. 죽었겠지. 인간은 물 속에서 저렇게 오래 버티지 못하니까. 늘상 깨끗하게만 느껴졌던 물이 더러운 듯 했다. 나가고 싶었다.
"-쵸로마츠?"
떨림이 가득한 음성. 열린 문 너머로 네가 있었다.
*-*-*
기억의 첫 시작부터가 그 놈이었다. 매일이 처맞고, 굶고, 폭언을 듣고, 다시 처맞는 일상. 놈은 늘 내게 내 능력 이상의 일을 쥐어줬고, 제대로 못할 때마다 분풀이를 하듯 나를 쥐어팼다. 이제 겨우 다여섯된 꼬마아이가 하루 안에 인형 수백여 개의 눈깔을 붙여낸다던가, 수백여 개의 편지를 접어낸다던가 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서, 나는 늘 맞았다. 발로나, 팔로나, 어쩔 때는 매라던가, 말로. 말로. 씹새끼. 죽여버릴 새끼. 새끼. 새끼. 난 그게 내 이름인 줄 알고 살았다. 쓸모없는 새끼. 개새끼. 엿같은 새끼. 지랄맞은 새끼. 새끼. 새끼. 새끼. 오소마츠.
9살 때 놈이 내게 준 것은 싸구려 붓과 싸구려 팔레트. 그리고 그림 한 점이었다. "다 외워라." 무슨 소리인지 이해부터가 힘들었다. 그래서 팔레트의 색들을 외웠다. 별 쓸모없는 것을 외웠냐며 폭언을 들었다. 높이 들어올려진 손을 보고서도 두려움에 몸이 굳어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놈은 내 머리채를 붙들고, 얼굴에 캔버스를 들이밀며 화를 잔뜩 삭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일까지, 이걸, 다 외우라고. 알았냐?" 나는 고개만 따박따박 끄덕였다. 가능할 리가 없다. 물론 그날도 맞았다.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어느 정도 붓과 물감을 손에 익히자, 놈은 소재의 문제인 줄을 알고 그제서야 유화를 사다주었다.
내가 제대로된 모작을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붓질 한 번만 다르게 해도 놈의 손에 매가 들리니 매일을 악착같이 외울 수밖에 없었다. 클로드 모네의 '연꽃'을 한 달에 걸쳐 외워내자, 놈은 더 빨리 외우기를 원했다. 마사초의 것은 이주 반에 걸쳐 외웠다. 다음,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일주일 만에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놈은 이제 안 보고 그리기를 바랐다. 매주, 매달, 중대, 중세, 근현대의 작가들의 그림을 보았다. 책 속의 것을 머리에 담았다. 하루라도 눈을 뗀 적이 없었다. 폴 고갱의 시원시원한 붓터치라던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섬세한 마감은 그 자체만으로 작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13살 무렵부터는 모르는 그림이더라도 그린 이를 알아맞출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지경이 되도록 그림은 못 그렸다.
캔버스, 책, 화면, 어느 것이든 좋았다. 완성된 그림을 보고 그리는 건 누구보다도 잘한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평면의 무언가가 아니라면 난 전혀 그려내질 못했다. 하다못해 사과 반쪽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사과의 물기가 반사해내는 빛이 표현할 대상이 아닌, 사과를 가리는 성가신 방해물로만 인식되었다. 그려낸 것은 연노란색의 무언가였다. 놈은 그것을 보더니, 숨기는 기색없이 한 차례 비웃고는 사과 반쪽을 제 입에 넣었다. "작품만 잘 알아보면 상관없다." 그 후로 놈은 내게 그림을 시키지 않았다. 모작을 시킨 것도 아니다. 놈은 날 경매장에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저건 진짜가 맞냐, 가짜 아니냐. 하고 물으면, 내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었다. 그림을 똑같이 그리기도 하는 판에 진품이고 가품이고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수중에 돈이 생기니 놈은 내게 잘해줬다. 내 몸에 멍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밥을 굶는 일이 없어 살이 붙기도 했다. 사람다운 꼴이 되가고 있었단 것이 어울리는 소리일 것이다.
17살부터는 내가 경매를 시작했다. 경매로부터 싸게 사낸 것을 번지르르한 말로 포장해 다시 경매로 팔아냈다. 돈이 쌓여갔다. 놈에게 매달 번 돈의 대부분을 뺏겼지만 착실히 통장의 0은 늘어갔다. 모작을 팔아치워 번 돈은 뺏기는 일이 드물어서다. 내 모작은 진품만큼 비싼 값에, 내 모작을 진품으로 착각한 인간들에게 사들여졌다. 토토코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이거 가짜잖아." 정밀검사가 아니고서야 가품인 줄 알 수 없었을 터다. 처음부터 신뢰가 없었단 뜻이다.
"진품이라고 말했던 적은 없잖아?"
"토토코는 진짠줄 알고 샀거든. 환불해줘."
"싫은데?"
간만에 생사길을 넘나들었다. 그 후부터도 토토코는 나라면 진저리를 내며 싫어했다. 이 판에서 나를 멀리해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아주 멀어지지는 못했지만, 일정 거리를 두고 죽어도 다가오지 않으려 하는 것이 눈에 훤했다. 어느 정도 깊이의 인간관계가 드물었던 나는 그도 마냥 좋았다.
그리고 20살. 인어를 보았다.
내가 그 늙은이를 찾아간 건 아니었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장문의 편지를 내게 보내온 것이다. '인어'라니, 미쳤다고 그걸 믿겠는지. 가서 비웃어줄 셈이었다. 하지만 가서 본 것은 진짜 인어였다. 살과 비늘의 경계가 한 치의 작위감도 없이 자연스러운 모양새. 두 눈동자는 렌즈 따위가 아닌 제 각막의 빛으로 한들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가장 내 눈을 잡아끈 것은 그 얼굴의 모양새였다. 나와 정확히 똑같은 얼굴. 운명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수중에 있지도 않은 돈으로 거짓된 백지수표를 써내어 지불했고, 놈에게 보낼 돈을 써서 수조 등의 시설을 마련했다. 네가 잡혔다는 바다와 똑같은 염도의 물을 가득 채워넣었고, 수질에 오염이 없도록 환수시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준비과정 속에서 얼마나 많은 돈들이 퍼날라졌느냐면, 언젠가 팔아냈던 고흐의 해바라기 진품만큼이나 비싼 값이었다.
며칠 동안 방에 틀어박혀 멍하니 네가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넋을 놓고 볼만큼 예쁜 이유도 있었지만, 내가 무언가를 대하는 태도로 아는 것이 그것 외에는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첫 3일간 네 순간순간을 외웠다. 푸르고 선명한 빛의 비늘을, 끝으로 갈수록 투명한 옅은 지느러미를, 하얀 피부를, 조금 발간 색의 눈가, 얇은 입술, 살짝 올라간 눈매, 늘 불만이란 듯 내려간 입꼬리. 길고 얇은 손가락, 척추가 도드라지게 올라온 등, 푸른 혈관이 비치는 목덜미, 각도와 빛에 시시각각 달라지는 눈의 빛깔-.. 같은 얼굴인데도 어떻게 그리 다른지. 어떻게 그리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내는지. 그리고, 아, 그래. 처음 들었을 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그 목소리. 여름을 닮은 목소리. 그래, 같은 듯 하면서도 너무나도 달라서. 그러면서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도록 닮아서. 도무지 사랑하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는 존재로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토토코의 말이 맞다. 그때 나는 사리분별 못하는 또라이 새끼였다. 하루종일 방에 처박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너를 관찰했다. 내가 아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그것이 전부였음으로 그렇게 했다. 놈이 나를 불러내 오래간만에 손찌검을 한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었다.
"뭐하다가 돈을 날려먹은 거냐."
내 머리통을 밟은 채 놈이 물었다. 피가 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게-.. 윽, 뭘 좀, 사느라."
"뭐. 작품?"
"아니.."
"그럼."
"...인어, 를.."
정말 눈 앞이 하얘지도록 맞았다. 아무것도 못하던 어릴 때 이후로 그렇게 죽기 직전까지 몰린 것은 처음이었다. 인어라니,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냐. 거짓말도 좀 그럴싸하게 해야 속던가 할 것 아니냐. 그 대가리로 장사를 어떻게 했냐.
"내가 우습냐? 응, 오소마츠?"
피를 토해내는 중에 들은 소리다. 무슨 개소리야. 늙어빠져도 이렇게 손이 매운데 어떻게 우스워해? 머리가 어질거리고, 귀에서 윙윙거리는 이명이 들리도록 맞을 때까지 제대로된 저항 한 번 못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저 늙은이를 정말 힘으로 못 이겨 버둥댔을 리는 없지. 난 그냥 놈이 미치도록 무서웠을 뿐이다. 목소리, 표정, 말투, 행동과 같은, 놈의 모든 것들이-..
"다음, 달에 못 보낸 돈까지, 보내 줄테니까-. 그, 만. 아파, 아저씨."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시당초 매달 개같이 일해 뼈빠지게 번 돈을 모두 놈에게 보냈었다. 아무리 더 일한대도 그 2배는 무리였다. 놈도 그걸 아는지, 어이없단 듯 짧게 웃으며 내 머리를 밟은 다리에 무게를 가했다. 아악, 하고, 짧은 비명이 터져나온다.
"돈은 필요없으니, 네가 샀단 인어를 그려봐라."
"아, 윽.. 그리라니, 무슨-.."
"네 놈이 뭔가를 사고 안 외웠을 리가 없지. 제대로만 그리면 믿어주마."
믿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림을 못 그렸으니까. 놈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붓을 쥐었고, 구태어 뎌사 떠올려볼 필요도 없이 확실하게 그림은 망했다. 그저 연하늘색 배경의 얼룩덜룩한 초록색의 무언가였다. 다시 뒤지도록 얻어맞았고, 일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몸상태가 될 때까지는 3일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혹시나 굶었을까, 해서 가장 먼저 네 방에 들렸다. 눈이 마주치자, 너는 눈을 크게 뜨고는 물 위로 올라왔다. 반짝거리는 두 눈에 알 수 없는 것이 가득했다. 화낼까, 왜 이렇게 늦었냐고.
"그, 뭐야 너. 어디서, 아니, 그보다 왜-,"
잔뜩 당황한 목소리. 화는 아니었다. 그럼 저게 뭐지?
"-맞았냐고?"
"..-그래."
"음, 그림을 못 그려서?"
너는 어이없단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와중에도 얼굴에 사라지지 않는 감정의 잔재가 가득했다. 나는 상황에 어울릴 법한 감정을 하나하나 덧대보았다. 비웃음, 짜증, 아, 그보다는 조금 더 아픈 쪽의 것. 슬픔? 아니, 그보다는-.. 도대체 저게 뭐지. 속으로 가늠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네가 그런 표정을 그만뒀으면 좋겠다.
"농담이야. 웬 이상한 새끼한테 걸려서."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언젠가 티비에서 보았지, 이 비슷한 상황을. 걱정끼치기 싫은 마음에 변명하는 이런 식의 모습을. 그래. 걱정! 나는 비로서 네 표정이 어떤 감정을 품은 것인지를 알았다. 너는 날 걱정하고 있었다. 걱정이라. 미친, 걱정이라고. 걱정을 받아보기란 처음인데. 가슴이 시끄러우리만치 두근대는 것이 느껴졌다. 온 몸이 달아오르도록 심장이 빠르게 뛰는 이유는 모두 너 때문이었다. 네가 날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네가 책임지는 건 당연하잖아? 평생 미친놈이란 소리밖에 안 듣고 살던 또라이한테 그런 이상한 걸 줘버린 네가 나쁜 거니까. 그치. 이제 포기하기 힘들어.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래. 집착하고 있어.
나갈 생각 하지마. 이 수조 바깥을 바라지 마. 내 걸로 남아줘.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더 내게 줘. 내 처음을 가져줘.
그래서 손을 뻗었다. 네가 거절할 줄을 알고. 겁많은 네가 거기 남기를 선택해버릴 줄을 알고.
"뭘 끌어올려주겠단 거야, 손이고 팔이고 성한 데도 없으면서. 가볍다고 착각했다가 큰 코 다치지 말고 치워."
내 기대를 조금도 깨지않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내가 환희에 젖었는 줄 네가 알까. 평생이 가도록 모를 것이다. 난 세상을 얻은 듯 행복했다. 넌 날 미워하지 않았다. 넌 날 때리지 않았다. 넌 날 멀리하지 않는다. 난 내 미친 짓에도 날 여전하게 대하는 널 못 이기도록 사랑했다. 그래서 또다시 토고의 손에 붙들려, 목이 아프도록 소리를 지를 줄 알면서도 그 방에서 나뒹군 것이다. 보다 못한 토토코가 찾아와 잔소리를 하게까지 만들었다. 토토코도 참 상냥하지. 날 싫어하는 주제에 맞아 죽는 걸 보기에는 마음에 걸렸을까. 아니, 도덕적 주체로서 그런 걸 방관하기란 어렸을련지도 모르겠다. 뭐, 나야 공감 안 가지만 말이야. 쿡, 쿡, 웃음을 죽였다.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간 방금 전 맞아 터진 배의 상처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올 것이다. 아-, 미친 것 같아 정말. 실컷 얻어터지고도 기분이 이렇게 좋다니. 그치만, 그도 그럴게. 이 꼴로 가면 또 걱정받을 테니까.
대충 지혈하고 몸을 비척비척 일어켰을 때, 놈은 집에 없었다. 뭐, 언제나 날 질리도록 팬 후에는 어딘가로 가버렸으니까. 보내준 돈으로 집이나 새로 사지, 계단 귀찮은데. 하고, 별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며 낡은 집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는 시트에 앉아 차의 시동을 키고, 어지러운 시야로 집으로 향할 때도 다른 느낌은 없었다. 그리고, 도착하고 나서야 불길한 것을 느껴버린 것이다. 박살이 난 집 대문의 잠금쇠 앞에서야. 다리 한 쪽이 거진 망가진 것도 잊고 전력으로 달렸다. 혹여나 네가 그 놈에게 무슨 짓이라도 당했다면, 그때야말로 미쳐버릴 것이다. 지금과는 비교도 못 하도록 돌아버릴 것이다.
마주한 것은 시체였다. 푸른 물 안에 검게 가라앉은 시체. 그 반대편에서 네가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이 뚝, 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길 새도 없이, 내게 말한다. "나 좀 꺼내줘."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이 꼴인데도 그런 말이 나온단 말이지. 저번엔 진짜 변명이었단 거잖아. 진짜 좋아. 팔에 끊어지는 고통이 오는 와중에도 널 끌어올려냈다. 수조의 배수관을 열어 물을 빼낸다. 놈의 옷자락이 물의 흐름에 축축하게 늘어진다.
"어떻게 죽인 거야?"
"그냥. 떨어트렸더니 죽던데."
"다 죽어가는 노인네답네."
"그런 다 죽어가는 노인네한테 왜 맞고 살았는데?"
"어쩌다 보니까-, 라고 말하면 안 봐줄거지?"
너는 둘로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한 꼬리를 수건으로 감싸 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비늘이 서서히 녹아들듯 살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이번에야말로 크게 웃어제꼈다. 상처가 욱씬거리는 것이 벌써 터졌다. 그래도, 유쾌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난, 진짜 이제 끝이야. 다 끝이야. 놈은 죽었다. 내 삶의 망할 그림자가 걷혔다. 죽어라 도망쳐도 따돌릴 수 없던 그것이 겨우내 걷혔다. 네가 걷었다. 네가 죽였다.
"일단 옷부터 입어봐. 아, 그러고보니까 전복이 들어왔는데 말이야. 오늘에야말로 전복 스테이크 해줄게. 먹고 얘기하자."
"그 꼴로?"
"아, 갈아입을게."
"아니, 아. 구급상자 가져오라고 멍청한 새끼야."
너가 가볍게 가슴팍을 치며 말했다. 하얗게 밀려오는 통증에 조금 몸을 굽히며 신음하자, 화들짝 놀라 묻는다. "괜찮아?! 도대체 얼마나 다친 거야..?!" 걱정. 아, 아-.. 정말, 못 견디게 좋아. 사랑해. 너무 달아서 안 맞은 머리가 다 아픈 것 같은 정도야. 사랑해. 정말 사랑해. 아, 그냥, 응,
"사랑해 쵸로마츠."
"..그렇게 갑자기 말해도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데."
"너 좋으라고 한 소리 아냐. 그냥 하던 생각이 혼자 나와버린 거니까."
"아, 그래.."
잔뜩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는 것이 제법 귀엽다. "구급상자 어딨어?" "나가서 오른쪽 방 천장에." "가져올테니까 기다려." 너는 어느새 다 마른 다리로 방을 나갔다. 그보다 너 전라인데. 뭐, 집에 아무도 없으니 상관없나. 나는 고개만 돌려 이제 푸르지 않은 수조 안을 바라봤다.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고, 박제라도 된 듯 그대로 굳어 바닥에 늘어진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썩도록 저대로 둘까. 아니, 분명 냄새 나겠지. 빠른 시일 내로 처리업자를 불러야겠다. 사인은 부주의로 인한 익사로 충분할 것이다. 인간관계가 지나치게 부족하던 사람이었으니 찾을 인간도 없을 테고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대충 흐트러트린 시야에 희미하게 풀빛의 무언가가 잡힌다. 초점을 맞춘다. 다 녹아들지 못했는지, 두어 개 정도 떨어져나온 네 비늘이다. 가만 들어 입가에 가져다댔다. 진하게 밀려오는 바다의 향.
언젠가 네게 주었던 'Cliff at pourville'가 떠올랐다. 어둑한 하늘. 높게 깎아지른 절벽, 그 아래의 바다.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해변. 언젠가 널 거기에 데려가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잘못 생각했다. 푸르빌의 절벽은 찾아서 가는 곳이 아니다. 어둑한 하늘, 높게 깎아지른 절벽, 그 아래의 바다. 사람이 없는 해변 따위가 주는 그 단절감은 어디에서나 쉽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지금의 이곳처럼.
나는 방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죽은 시체, 수조의 두꺼운 유리벽, 푸른 비늘,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
"뭐하는 거야?"
"-아무것도?"
조심스레 내 몸을 일으켜세우는 손짓에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내겐 네가 있는 이곳이, 푸르빌의 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