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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은 오소마츠였다. 중학교로 올라간, 중1의 형에게 변화가 생긴 것이 시초였다. 형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이불에서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에 옆에서 고함을 지르고 뺨을 때려도 안 일어나더니, 점심 때쯤에야 비척비척 일어나 밥 한 두숟갈을 떠먹고 도로 홀리듯 잠에 들었다. 방바닥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린 오소마츠형을, 그때까지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스럽게 잠이 많네- 하고 넘겼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형은 병든 닭처럼 굴었다. 겨우겨우 끌고간 학교에서는 내내 잠만 퍼잤다고 한다. 수업시간에는 자더라도 쉬는시간이나 급식시간에는 반드시 일어나던 전과 달리 그저 하루 내내 잠으로 보냈단다. 엄마는 그때서야 오소마츠형을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가 말하길, 클라인-레빈 증후군. 그것이 형을 잠으로 몰아넣은 망할 병의 이름이었다.
형은 잠을 잤다. 잠만 자는데 학교에 나갈 이유도 없었다. 퇴학신청을 하고 돌아서는 엄마의 뒷모습이 여위어 보이셨다. 중학생이 되었으니 후드티 하나쯤은 있는 것이 좋지않느냐며 신이 난 얼굴로 사오신 색색의 후드티 중 붉은 후드티는 아직까지 주인이 입어본 적 없이 옷장에 걸려있었다. 형은 그래도 잘 잤다. 한숨자고 일어나면 맑은 눈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형은 아무리 적어도 하루에 열댓시간은 잤다. 어쩔 때는 밥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전부 넘겨버리고 하루 내내 잘 때도 있었다. 그런 형에게 하루는 너무 빠른 것이었을테다. 형은 그래도 잘 적응했다. 나랑 달리.
나는 적응하지 못했다. 형과 달리. 일평생 함께해온 파트너가 잠에 들자, 나는 할 것을 잃어버린채 떠돌았다. 그러다가 연필을 쥐고 공부를 하였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말이 언뜻 머리에 스치고 지나가서였다고 생각한다. 그때 나는 미치도록 할 것이 없었으니까. 형은 달라진 내가 놀랍다는 듯 자주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것이 좋아 부러 더 공부에 열중한 척 했다. 다른 녀석들보다 내게 더 많이 말을 걸어주는 것이 좋았다. 밤새도록 공부했다. 잠이 든 형의 머리맡에 앉아 스탠드를 켜두고 공부했다. 내 스탠드의 불이 아무리 밝아도, 형은 아주 잘 잤다. 나와 달리.
난,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2.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 형이 자다가 일어나지 않았다. 잠에 든 지 이틀 째인데도 여전히 일어날 기색이 보이지않자 옆에서 형제들이 온갖 요란을 다 떨었다. 이러다간 정말 죽어버리는거 아냐, 싶을 정도로 곤히 잤다. 이제껏 말 그대로 삶을 연장하는 데 필요한 시간 외에는 거의 잠으로 보내던 형이었기에 몸은 말라있었다. 얇은 팔을 들고 마구잡이로 흔들며 깨우다가,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울자 다른 형제들도 나이를 잊은 것마냥 따라 울기 시작했다. 울음바다가 된 집에 돌아오게 된 아빠는 엄마를 도닥이며 형을 데리고 병원에 향하였다. 다음 날, 퉁퉁 부은 눈으로 학교를 다녀온 후 간 병원에는 링거가 연결된 형이 얌전히 잠에 들어있었다. 줄곧 잠만 자고 있었다고 했다.
형이 3일 내내 잠만 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형은 그러고 나서도 일주일을 더 잤다. 수액으로만 연명하니 그나마 붙어있던 근육들이 비쩍 말라가고있었다. 미라가 되면 내가 업고다닐까- 라고 태연히 생각할 수 있게 된 쯤에, 형은 눈을 떴다. 그때 내가 그 옆에 있었다. 형이 그 망할 병에 걸린 후, 오소마츠가 잠에서 깨는 것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고요히,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린 넌 눈동자를 한 번 굴리더니, 옆에 서있던 날 보고 평소답지 않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늘은 바로 옆에 있네. 학교는 잘 다녀왔냐?" 매우 일상적인 대화였다. 그럼에도 나는 형이 눈을 떴단 사실만으로 감격에 겨워 그 자리에서 쓰러져 울었다. 곧장 몸을 일으켜 당황한 눈을 하곤 날 달래던 형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연했다.
그 날 이후, 나는 쉽사리 잠들지 못하게 되었다. 많이 자면 하루 6시간을 잤고, 잠이 정말 죽어도 안 오는 날에는 아예 잠에 들지못했다. 두 눈을 고이 감아내리고 기나긴 꿈을 꾸고있을 형 옆에 누워 가만히 그 얼굴을 감상했다. 분명 거울을 보면 같은 얼굴이 있을 터였지만, 너라 그런가 달라보였다. 오소마츠는 그 해 여름 이후로 긴 잠에 빠져드는 일이 많아졌다. 하루는 기본이고 많게는 8일 내내 잠에 들었다. 형이 하루에 두 번 이상 잠에서 깬다면 그것은 운이 아주 좋은 거였다. 우리는 형이 며칠간 잠에 들었는가를 계산하며, 언제 병원에 데려가야하는지를 세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잠에 들지 못했다. 형은 그래도 잘 잤다.
3. 나는 고등학교에 갔다. 형제들은 이제 내 눈 밑에 자리한 다크서클에 민감히 반응하지 않았다. 엄마나 아빠도 괜찮은지 지나가듯 묻는 게 전부였다. 내 안색에 걱정을 표하는 것은 오소마츠형 뿐이었다. 형은 오랜만에 잠에서 깬 날이면 내 얼굴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볼을 한 두번 늘려보거나 하는 식으로 장난을 걸며 웃었다. "괜찮냐? 날이 갈수록 병신이 되네." 나는 그 걱정이 내심 좋아 형을 말리지 않았다. 형은 잠에서 일어나면 부스스한 꼴로 나나 다른 형제들과 대화하며 밥을 먹고, 간단히 씻고, 다시 잠에 들었다.
어쩔 때는 형이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나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늘 깨어있는 사람은 나였기에 내가 형에게 밥을 해주곤 했다. 난 그 시간이 가장 좋았다. 고요한 밤중에 그 지붕 아래서 깨어있는 사람은 형과 나 뿐이었다. 몇 번 못 되는 경험이지만 그 시간만큼 행복한 시간은 또 없었다. 아침이면 깨어난 형제들이 싱크대에 있는 그릇을 보고는 내게 와 물었다. "어제 밤에 형 일어났었어?" 맞다고 대답하면 왜 깨우지 않았냐며 원망어린 시선을 보내곤 했다. 난 그래도 결코 녀석들을 깨우지 않았다.
형이 눈을 뜬 밤이었다. 나는 그때 드물게 나를 찾기 시작한 수마에 다른 형제들 사이에 끼어 잠에 들 준비를 하고있었다. 너는 평소 우리방에서 자지않았다. 하루종일 우리 방에 이불을 펴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홀로 손님방에서 잤다. 나는 그래서 평소 손님방, 일명 네 방에서 주로 공부를 하거나 시간을 떼웠지만 그 밤은 아니었다. 한참 졸린 시점에 너는 조용히 우리 방문을 열었다. 비몽사몽 꿈결에 나는 누가 방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비척였다. 너는 내 머리맡에 다가와 살며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쵸로링이 자고있는 건 처음이네. 어릴때 빼곤 이래본 적이 없으려나."
"..."
"형아 꿈 꿔야한다~? 형아 혼자는 외로우니까."
지금 와 생각해보면 참 잔인한 말이었다. 깨어있을 때도 지 생각 뿐이었는데 무얼 꿈에서조차 네 생각에 가득 잠겨보내란 말인가. 그래도 난 그날, 거짓말처럼 네 꿈을 꾸었다. 참 온화한 꿈이었다. 형은 잠에 들지도 다른 일들에 쫒기지도 않았다. 느긋하게 나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짓고있었다. 그날은 정말 드문 날이었다. 나는 새벽에 깨지도 않았고, 늦은 아침이 되서야 일어났다. 나도 놀라 시계를 보았다. 7시 반. 이토록 평범하게 깊은 잠에 든 것이 얼마만이었던가. 뒤늦게 떠오른 어젯밤의 기억에 조심스레 들어간 손님방에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네가 얌전히 누워 잠에 들어있었다.
4. 선도부 회의가 일찍 끝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가하던 길이었다. 집에 들어가려고 집 열쇠를 찾는데, 현관문이 스스로 열렸다. 빨간 파카를 입은 네가 멀뚱멀뚱 안 들어오냔 듯 내쪽을 보고있었다. 순간 바쁘게 머리가 돌아갔다. 토도마츠는 오늘 약속이 있었고, 쥬시마츠와 카라마츠는 동아리 활동으로 늦는다. 이치마츠는 분명 쥬시마츠를 기다릴 터였다. 그렇다면 역시 집에는 오소마츠형 혼자. 그 생각이 들기 무섭게 오소마츠형을 밀고 현관에 앉혔다. 뭐하냐며 당황스레 묻는 형에게 신발장에서 내 신발 한켤레를 찾아 건네주었다. 형 신발은 없었다. 이제 형은 더 이상 나가지 않았으니까.
"신어. 나가자."
"어딜? 그보다, 나 깬지 꽤 됐는데."
"아직 안 졸리잖아. 자면 내가 업고 돌아올테니까, 빨리."
너는 얼굴을 약간 찌뿌리다가도, 오랜만에 밖에 나간단 사실이 기쁜지 감춰지지 않는 미소를 하고는 신발을 신었다. 약간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신발은 꼭 맞았다. 육둥이의 힘이랄까, 유전자는 대단하네-. 나는 실없이 생각하다가 형이 신발을 다 신은 것을 확인하고는 붉은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거리로 나올 때까지 고민하다가 뒤돌아 물었다.
"가고싶은데 있어?"
"에.. 어디든? 나 이제 이 근방은 모르는걸."
정정하자면, 형은 이제 세상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도 형도 굳이 그것을 지적하진 않았다. 내가 그것을 지적하지 않은 이유가 동정심이라고 형이 오해하지 않도록 뒤늦게나마 덧붙였다.
"괜찮아. 내가 아니까."
네가 몰라도 내가 아니까, 괜찮았다. 너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어린날 자주 가던 놀이터가 남아있느냐 물었다. 나는 낡아서 없었졌다고 답하며 대신 다른 놀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지기까지,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 부모님이 집에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초조한 걸음을 터벅터벅 따라오는 네 숨이 조금 가빠서, 겨우 보폭을 줄여 걸었다.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 하늘 아래, 너는 거친 숨을 진정시키며 그네에 걸터앉았다. 새로 지은 놀이터라 그런지 말끔했다.
너는 여기저기가 신기한듯 주변을 살피다가, 작게 발을 굴렀다. 그와 함께 그네가 앞뒤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너는 살랑이는 바람 속에서 내게 말했다. 지평선을 향해 내려가는 태양을 두 눈에 가득 담아놓고.
"자기 싫다."
"..꿈 속에서도 그네는 탈 수 있잖아."
"꿈에서는 진짜 너랑 같이 못 있는걸."
너는 그리 말하고는 천천히 감기는 눈을 두 손으로 부볐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잠에 반쯤 취해 걸음이 비틀거렸었다. 내가 억지로 끌고 끌어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었다. 그네에 앉아 위태롭게 수마에 잠식돼가는 널 받쳐안았다. 네가 졸음에 잠긴 눈을 몇 번 껌뻑거리더니, 씨익 미소지으며 말했다.
"다음에 여기 또 오면 좋겠다."
"너가 잠만 안 퍼자면 분명 또 오게될걸."
"그때도 쵸로마츠가 업어서 가는거지?"
"그때 가서도 잘 생각이냐."
"그건 아니지만은-.." 너는 뒷말을 흐리며 기어코 잠에 들었다.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다시금 기나긴 잠에 빠져버린 너를 조심스레 업었다. 중학교 시절 무심코 널 업고다닐까 하고 생각하던 것이 떠오른다. 널 안아든 다리를 감싸쥐어본다. 형제들 사이에서 마른 나보다 더 가는듯한 다리가 손에 잡혔다. 이러다가 정말 미라가 되겠는데. 실없이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목가에서 느껴지는 숨소리가 평온했다.
그 날 얼마나 혼났는지 모른다. 예전 사고뭉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아 혼나는 중에도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뭘 웃으며 혼나느냐고 엄마가 매를 몇 번 두드리셨지만 전혀 무섭지않았다. 결국 몇 대 맞아 다음날 종아리가 약간 따가웠지만 그것마저도 좋았다. 네 얼마안되는 꿈 밖의 기억에 내가 하루 더 늘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5. "그러고보니 너네 슬슬 졸업하겠네!"
드물게도 너가 잠에서 깬 주말이었다. 밥 몇술을 뜨고나선 코타츠에 틀어박힌 널 따라 다른 형제들도 자연스레 거실에 달라붙어있었다. 거실에 있는 마츠들과, 부엌에 있는 엄마아빠를 포함해 네 말 속에 담긴 일말의 부러움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부러 명랑하게 말을 꺼냈지만 숨길 수 없었다. 네가 아무리 연기를 잘한대도, 그리고 잘 감췄대도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토도마츠가 밝게 대답했다. 열등감을 드러내고싶지 않은 너에 대한 배려였다.
"이번에도 단추 잔뜩 뜯겨서 올거니까~. 벌써 예약 꽉 찼다고?"
"에-! 형아 꺼는 없는 거? 너무하잖아~!"
"..뭐 난 줄 사람도 없으니까.."
"아, 이치마츠 프리? 그럼 단추 하나 형아 걸로 예약!"
"헤헷, 주문 감사함다."
단추라, 친구녀석이 두번째 단추는 자기 차지라고 비워두라던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난 몇 년간 함께해준 녀석이라 정말 그렇게 해줄까 고민했는데, 생각해보니 단추 주인이 따로 있었다. 저번에 주지 못했던 두번째 단추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번만큼은 네 것이었다. 중학교 졸업식 때, 넌 졸업식만큼은 꼭 가겠다며 다짐해놓곤 몇시간 채 버티지 못하고 잠에 들었다. 그러고 나선 졸업식에 못 갔다고 하도 우울해하길래, 기분전환겸으로 해줄 것이 뭐 없을까 고민하다가 준 것이 교복 단추였다. 두번째 단추를 가장 친절하셨던 선생님께 드려버려 못 준게 미안해서, 하복 단추와 다른 단추들을 죄다 뜯어내주었다. 너는 이게 뭐냐며 묻다가, 이유를 듣고 웃었다. 잠에서 오래 깨어있는 날이면 너는 네 물건들을 정리해둔 서랍장을 열어보곤 했다. 어깨 너머로 그 안을 들여다보면, 한 쪽 구석에서 단추 여러개가 보관된 투명한 케이스를 볼 수 있었다. 난 네가 아직껏 그것을 간직해주는 것이 좋았다. 그렇기에 다음에는 꼭 두번째 단추는 네게 주겠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나쁜 질문임을 앎에도 애타서 물었다.
"이번 졸업식에 올거야?"
"..에-, 가려고 노력은 해볼건데. 못 가면 못 가는거고~."
네 애매한 대답에 토도마츠가 살짝 내쪽을 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뭐하러 그런 질문을 하냔 뜻이다. 3년 전 네가 우리 졸업식에 못 온 것으로 우울감에 빠졌었단 건 모두가 알았다. 카라마츠 역시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걱정어린 눈을 했다. 슬픈지 미묘하게 일그러진 네 얼굴을 보다말고 말했다.
"무리면 굳이 깨어있지않아도 되니까."
"형아 집에서 얌전히 잠만 자라고? 외롭게시리~!"
"아니, 이번에는 그냥 안고갈까 싶어서."
쥬시마츠에게 귤을 까먹이던 토도마츠의 손이 우뚝 멈춘다. 쥬시마츠 역시 귤을 양껏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것을 멈추고 꿀꺽 넘겨버렸다. 제일 압권인 것은 네 표정이었다. 슬픔에 어딘가 한 구석이 구깃해진 얼굴을 하고있던 네가,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날 바라보았다. 나는 뭐가 문제냔 듯 일부러 태연스런 투로 말했다.
"왜? 저번에 업어보니까 그닥 무겁지도 않던데."
"쵸로마츠형 진심임까-?"
"무모하네~!! 해도 되는거야?!"
"아니아니 쵸로링, 그렇게까지 가고싶은 건 아니니까? 너무 막무가내로 하지말자구~."
하나같이 달려들어 뜯어말리니 이게 그렇게 경악할 일인가 싶다. 하기사야 졸업식에 형을 안고오는 놈이라니 미친새끼 소리 들을법하지만, 인생에 몇 안되는 졸업식인데 육둥이 중 하나가 빠진다는 것도 우스웠다. '여섯이서 하나' 라는 슬로건이 운다. 더불어서, 내 인생 마지막 졸업식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 네가 없단 것 자체가 기분이 꽤 나빴다. 엄마나 아빠가 안 온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서도 네가 안 온다면 이상하게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았다. 그같은 날에 기분이 잡치면 안되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건 중요한 사안이다. 난 무조건 널 끌고갈 거였다. 뭔 일이 있던간에 무조건적으로.
달래기라도 하듯 날 설득하기 시작한 널 바라보다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넌, 너무 빠르게 철이 들었다.
6. 넌 보통 3일에 한 번 잠에서 깬다. 그것도 깬다고 해봤자 겨우 3, 4시간이 전부다. 다른 사람이 일주일 동안 112시간을 살 때, 너는 잘해봐야 10시간을 산다. 우리가 한달을 살 때, 너는 3일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몸은 우리와 비슷하게 컸다지만 그 속의 너는 얼마나 어릴까. 우리가 고3이 되도록 너는 아직 중1에 머물러있을지 모른다. 어느새 졸린 듯 눈을 깜빡이는 너를 보다가, 살며시 손을 들어올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뭐냐는 듯 내쪽을 째려본다.
"뭐하는 거? 형아역은 내 건데~."
"알아."
네가 그 '형아역'을 사수하려고 몇 번이나 열심히 성장했는지를, 눈 떠보면 어느새 훌쩍 자라있는 우리탓에 네가 얼마나 초조했을지를 알고있다. 너한테 그것을 뺏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네가 무리해서까지 우리를 따라잡아야만 한다는 강박에 등밀려 성장하길 원치않는다. 넌 너가 성장할 수 있는만큼만 크면 된다. 아무도 네가 그토록 힘들어하길 원치않는다.
"그냥 쓰다듬어보고 싶어."
어리광을 부리기도 전에 그럴 수 있는 시기를 놓쳐버린 너에게, 그럴 수 있는 자유를 주고싶었다. 너는 얼마 안 가 잠에 들었다. 또다시.
7. 졸업식이 내일이다. 너는 4일째 잠에서 깨지않았고, 이틀 후면 병원에 가야할 판이었다. 나는 조용히 가라앉은 거실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열고 고양이 한 마리와 노닥거리는 이치마츠와 쥬시마츠. 휴대폰에 얼굴을 처박고 들 생각을 하지않는 막내. 그와 마찬가지로 거울에 파고든 차남. 말은 하고있지 않지만, 여기있는 모두가 너가 기적처럼 내일 일어나주길 바라고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랐다. 할 게 없으니, 저마다의 일상을 보내는 형제들 사이에 끼어 무얼 해야할지 전혀 감도 잡히지않았다. 네 방에 가서 기도라도 하면 되려나. 나는 혹시나 싶어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네 방문을 열고, 나는 그대로 멈춰섰다. 창문틀에 걸터앉아 바깥을 내려다보던 네가 놀란 듯 날 바라보다가, 살풋 웃으며 말했다. "아, 망했네." 나른하니 평온한 어투였다.
"..왜 거기서 그러고있어? 언제 깬거야."
"글쎄, 한 30분 됬으려나."
"어째서 내려오지 않은건데."
"..내일 졸업식이지 너네?"
"오늘 내가 깬 거 알면, 실망하지 않으려나 싶어서." 쿵, 하고 무언가 떨어져내린 것만 같았다. 나는 그대로 무너졌다. 당황한 네가 허둥지둥 내 곁에 다가와 물었다. 어디가 아프냐, 왜 그러냐, 그렇게까지 실망이냐, 하고, 온갖 걱정을 옆에서 쏟아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수십번도 더 말을 고르다가 결국 포기하고 눈 앞의 널 끌어안았다. 곧 머리에서 익숙한 손길이 느껴졌다. 나보다 높은 체온에 더 깊숙히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바로 옆에 자리한 귀에 대고 속삭인다.
"우리 눈치 보지마."
"..."
"너 하고싶은대로 해. 가뜩이나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왜-.. 왜 우리 눈치를 보는 거야.."
너가 하다못해 싫다고, 널 두고 우리끼리만의 졸업식을 진행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않는다고 딱 한 마디만 했더라도 우리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을 터였다. 너와 우리 모두가 함께 고등학교 마지막을 보낼 방법을 분명 찾았을 것이다. 네가 지금처럼 마냥 어른스러운 체하기에 아무도 네 자존심을 건들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조금 더, 아주 조금 정도는 더..
"아이같이 굴어, 좀. 아무도 너한테 뭐라하지 않아-.."
너는 말이 없었다. 깡마른 몸을, 조금 더 끌어안는다.
8. "아-, 결국 일어나버렸네! 뭐 어쩔수는 없지만."
아쉽단 기색이 감춰지지 않는 목소리에 네가 어색히 웃었다. 지금 일어났으니 내일은 꼼짝없이 잠만 잘 것이 분명했다. 코타츠 안에 몸을 파묻은 네가 말했다. "그렇지 뭐, 배고픈데 형아 밥 좀 줄 마츠~?" 카라마츠가 냉큼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가 버티기 버거운 모양이었다. 이치마츠가 뭐라고 말을 걸고싶은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말을 삼켰다. 쥬시마츠가 그 옆에 꼭 붙어 고양이 한 마리를 이치마츠에게 꼬옥 안겨주었다.
"뭐, 일단 미리 졸업 축하해."
네 말에 답한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곁눈질로 네 표정을 살폈다. 웃음지은 채로 딱딱하게 굳어서는, 펴질 기미가 보이지않는다. 내 시선을 느낀듯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한 표정을 하고는 고개를 돌린 네가 씩 웃었다. 꾸민 티가 나는 웃음. 거기에 최대한 마주 웃어주었다.
9. 졸린듯 눈을 깜빡이는 널 보다못한 이치마츠가 입을 열었다. "그만 올라가서 자." 솔직히 말하여 꽤 오래버틴 편이었다. "역시 졸업식에는 가고싶은걸~." 이라는 오기 하나로 7시간 가까이 깨어있었으니까. 이토록 오래 깨어있는걸 보는건 중학교 2학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너는 꾸벅, 꾸벅 잘 가누어지지않는 머리를 힘겹게 들어올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아- 역시 어쩔 수 없나, 형아 몫까지 졸업식 즐기고 오라고~? 형아, 이제 그만 잘테니까.."
거실을 나서는 널 바라보다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반쯤 충동적으로 그러한 것이다. 너는 어차피 이제부터 잠에 들어서, 며칠 동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까. 그리고 네가 잠에서 깬 후면 난 성인일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저질러보겠어? 잠에 침식해 걸음걸이가 비틀거리는 네 뒤에 바짝 따라가다가, 계단을 오를 때쯤 널 뒤돌아세웠다. 비몽사몽, 반쯤 벌써 잠에든 목소리가 네 입에서 피어나온다. 뭐냐며 물으려던듯 보이던 입 위로 입술을 갖다댄다. 짧막한 키스 후로 들어난 네 눈은, 언제 잠이 왔었냔듯 바짝 놀라 휘둥그레해져 있었다.
"쵸로마츠?"
알 수 없는 감정이 가득 피어난 네 눈을 바라본다. 당황, 혼란과 함께 얽히섥히 얽혀서는, 그 와중에도 반짝이며 제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 보였다. 난 그것이 내 눈에 어려있는 것과 똑같은 것임을 알았다.
10. "병원에 가봐야하려나. 응급실에라도 갈까?"
걱정스런 어조의 엄마에게 괜찮다며 웃어보인 네가 얼굴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정확히는, 네 입술 위를. 나는 아직까지도 염려의 눈빛을 지우지 못하는 엄마를 일으켜 세워드리며 말씀드렸다.
"괜찮다니까. 뭐 특별히 이상한걸 먹어서 저러는 것도 아니고."
"그럴려나... 무리하면 안된단다. 알겠지?"
"에, 응.. 엄마도 잘 자."
나는 문에 가려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려 널 바라보았다. 너는 느릿히 눈을 깜빡이다가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의 초침은 어느새 새벽 1시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너는 그것이 믿겨지지 않는듯 눈만 깜빡이다가,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대단하네 쵸로마츠. 인간 각성제?"
"그런 거 아니란 거 알잖아. 그냥 놀란거면서. 그게 그렇게 충격이야?"
"너도 충격일 줄 아니까 한거잖아?"
맞다. 충격일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다. 어느새 개그프로에 눈을 고정시킨 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그래, 맞다. 확실히 네게 이것이 충격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을 한 이유가 잠을 이루지 못하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버티기 힘들다. 네가 잠에 들지 않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는 그저 충동적으로, 지금껏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지던 것을 실현해버리고만 것뿐이다. 입술을 짓씹었다. 너를 졸업식에 데려가기 위해서, 같은 말로 포장할 수 있겠지만, 그건 비참했다.
나는 너에게 형제애 이외의 애정을 품고있었다. 변명할 수 없이 그랬다. 형제에게 표할 수 있는 평범한 애정 그 이상의 사랑을 품고있었다. 난 널 형제 이상으로 사랑했다. 네가 내게 주는 관심을, 또 너와 함께하는 시간을, 쉽게 사라지지 않을 네 성장통마저도, 좋아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너는 여전히 개그프로를 보고 있었다. 손을 뻗어 네 얼굴을 돌린다. "왜?" 라고 묻는 네 입에 살며시 입맞춘다. 그저 그렇게만. 입술과 입술이 서로 맞닿을 거리에서 멈춰있었다. 놀란 네 숨이 내 입술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네가 몇 번 입을 달싹이다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네 머리를 고정시키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너는 가만히 나와 입을 맞춘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너가 고개를 떼지않은채 물었다. 건조한 입술이 서로 스친다.
"더 안할거야?"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러고싶지 않았다.
11.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형제들이 옆에서 뒤돌아 등 뒤의 너에게 인사하고 있을 때에도 널 향해 인사하지 않았다. 너 또한 내가 그러지 않기를 바랐을테다. 지금 널 보고 발갛게 달아오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어제 그야말로 정신이 나가, 관계 직전까지 밀고나갔던 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했다. 너와 하는 것을 몇 번 상상해보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실제로 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졸업증서를 받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어쩌면 잔뜩 긴장한 나만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주변에서 몇몇 녀석들이 북받친 듯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제서야 겨우 뒤를 돌아봤다. 엄마와 아빠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고, 넌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나는 다가가 물었다.
"오소마츠형은?"
"아, 오소마츠는 방금 토도마츠가 소개시켜준다고 데려가더구나. 또래 얘들이랑 어울리고 있는걸 보니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뭐, 토도마츠가 옆에 있으니 괜찮겠지. 아, 쵸로마츠. 졸업 꽃다발 받아라. 다른 녀석들 거는 오소마츠가 주러갔는데 네 건 안받아간다더라. 싸웠냐?"
하얀 수국이 푸르게 가득 피어난 꽃다발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물론 이 꽃다발을 네게 받는 것도 좋았을테지만, 역시 마주치지 않는 게 더 정신건강에 이로웠다. 나는 아버지가 들고계셨던 종이가방을 내려보았다. 남은 꽃다발은 없다. 나올 때에도 꽃다발은 5개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엄마를 바라보고 물었다. "오소마츠형 꽃다발은 없어?"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난감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하셨다.
"그러게 말이지. 며칠 전에 오소마츠가 꽃다발은 필요없으니 사지말라고 한사코 그러더라고.. 서프라이즈로 사주는 게 좋았으려나?"
"원 녀석도, 사주겠대도 마다람."
나는 한마디씩 얹는 부모님을 살피다가, 왁자지껄한 개판이 벌어지는 뒤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집으로 가는 무리도 있었고,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는 이도, 또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이들도 있었다. 너는 그 사이에서 토도마츠가 빌려준 연갈색 코트를 입고 서있었다. 워낙 비슷한 옷이 많아 헷갈릴 법도 하건만 너는 눈에 쏙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곧 있으면 형제들이 모여들 것이었고, 그럼 다같이 모여 사진을 찍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면 끝이다. 오늘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단 듯. 우리는 이 사이가 적당하단 것을 증명하듯이.
12. 가쁜 숨을 들이쉬는 너가 보였다. 발갛게 물든 볼을 손에 쥐고는 살짝 벌어진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짧은 버드키스에 네가 시선을 살짝 피하고는 작게 키득였다. 웃는 얼굴이 사랑스럽다. 부연 시야를 신경쓰지 않고 네 품에 파고들어 목 위로 입맞췄다. 머리가 어지럽다. 이게 아니다,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리를 맴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없이 달았다. 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는다. 이제는 머리가 아려올 정도로 소리친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이러지 않았어.' 나는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놀란 네가 날 바라보다가, 물처럼 쏟아져내렸다. 이 곳은 우리집 거실이 아니었다. 미치도록 흰 방 속에 너가 변한 물웅덩이와 함께 내가 있었다. 나는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곳에 비친 것은 내가 아니다.
서늘한 무표정을 한 네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 또한 그 너머의 너를 바라봤다. 너는 날 바라보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뻐끔, 뻐끔, 수면으로부터 물거품이 올라와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귓가에서 그것들이 터진다. 귀에 스민 것은 네 목소리였다.
[ 이렇게- ]
[ 그만둘- ]
[ 거면, 왜- ]
[ 시작했어-? ]
나는 흐려졌던 초점을 다시 맞춘다. 너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허나 여전히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얼굴로 날 주시하고 있었다. 속눈썹에 아슬아슬히 맺혀있던 네 눈물이 기어코 떨어진다. 그리고 내게 올라와, 볼에 부딪혀 나를 타고올랐다. 나는 눈을 깜빡인다. 한 번, 두 번, 세 번-..
13.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저녁노을에 뜨겁게 달궈진 손을 달싹이다가,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멍한 정신 속에서 아빠가 운전을 하고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다른 녀석들도 조용히 잠에 들어있었다. 너 역시도. 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꾸고있었던 꿈을 돌아보았다. 무표정으로 눈물을 떨궈내던 너를 회상하다가, 다시 한 번 너를 보았다. 너는 숨을 작게 내쉬었다가, 깊이 들이마쉬며 세상 모르게 잠에 들어있었다. 자세를 고치려 움직인 손 쪽에서 비닐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난다. 오늘 오전에 엄마에게 받은 졸업축하 꽃다발이었다. 하얀 수국이 붉은 노을에 물들어 그저 빨갛게만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아빠는 운전 중이다.
"아빠."
"오, 쵸로마츠. 일어났냐."
"어제도 잠을 못 잤니? 하기사 오소마츠랑 노느라 못 잤겠네. 조금 더 자도 괜찮단다. 집에 도착하면 깨워줄게."
"아니, 여기서 내려줘."
"응? 왜? 두고온거라도 있는거니?"
"그, 응. 일 마치고 바로 집에 갈게. 내려줘."
내게 따갑게 내리꽂히는 엄마아빠의 의아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차에서 내렸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겨우 다잡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보폭을 늘렸다. 너가 언제 깰지도 모르지만 최대한 빨리 주고싶었다. 전해주고 싶었다.
네게 이렇게 그만둘 생각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14. "..쵸로마츠?"
"아, 일어났어?"
너는 6일 내리 잤다. 늘 그랬듯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너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고등학교도 졸업했겠다, 이젠 평일에 갈 곳이 없어진 나는 네 머리맡에 앉아 초조하게, 행여라도 꽃이 시들까 하루가 멀다하고 물을 갈아주었다. 너는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이다가, 네 옆 탁자에 놓인 화병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저가 며칠 잤는지는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태연히 묻는다.
"이거 뭐임? 쵸로링 꽃은 하얀색 아녔던가?"
"..네 꽃이야."
"아, 엄마가 결국 사버린-,"
"아니. 아냐."
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일으키며 반박했다. 갑작스레 몸을 일으킨 나 때문에 놀랐는지 네 몸이 흠칫 떨린다.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길 수 초. 도무지 열리지않는 내 입을 기다리는 것도 지쳤는지 네가 두 눈을 반짝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럼?" 목 너머로 뱉는다면 더이상은 되돌리지 못한단 생각에 머뭇거리다가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음을 되새기며 말을 뗐다.
"내가 산 거야. 너 주려고."
"..쵸로마츠가? 왜?"
"..너, 알면서 묻지 마."
너는 짓궂게 미소지었다. 나는 더운 얼굴에 고개를 돌렸다.
15.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거짓말마냥 불면증을 버려냈다. 졸업이 계기였는지, 아니면 꽃집에서 샀던 붉은 꽃 몇송이가 계기였는지는 모르나 잘 된 일이었다. 너 또한 얼마 안 가 그 거지같은 증후군에서 벗어났다. 우리가 졸업하고 딱 7달 만이었다. 뭐, 20대 중반에 들어서기 직전인 지금에도 잠에 약하단 사실은 변치않으나, 예전마냥 하루 혹은 이틀 간 잠에 빠져드는 일은 없었다. 너는 어른이 되고서야 네 남은 인생이나마 다른 사람들처럼 편히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방바닥을 뒹굴대며 하릴없이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세어보다가, 미칠 듯한 지루함에 집안을 종횡무진하며 여기저기에 놀아달라 떼쓰다가, 치비타네로 타박타박 걸어가 술 두세잔을 마시기도 하고, 그렇게 취해 집에 들어와 잠이 들면 다음날 아침 숙취로 고생하며 눈을 뜬다. 네 하루는 쳇바퀴처럼 반복됐다. 인간관계, 아는 곳, 아는 것. 모든게 부족한 네가 매일이 색다른 삶을 살기란 참 어려운 것이었다.
가만히 네 얼굴을 들여본다. 내 시선을 느낀것인지 뭐하냔 표정으로 맞받아치던 네가 씩 웃으며 얼굴을 드밀었다. "왜? 형아 잘생김?" 장난스런 어조에 질색을 하며 몸을 빼려다가, 조금은 측은한 마음에 대답했다. "응, 그러네."
"엑, 쵸로마츠 머리 이상해진 거 아님?"
"아니, 형이 먼저 그렇게 물어봤으니까."
"에-.."
문득 어느날이 떠오른다. 이제 막 봄이 찾아드는 하늘 아래 걸터앉아, 나를 보며 웃고있던 네가 있던. 네가 우리를 실망시키고 싶어하지 않은 마음에 방에서 차마 나오지 못했던 그 날이.
"형."
"응? 왜?"
"예전에, 졸업식 전 날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에-.. 글쎄! 너무 오래전 일 아님?"
"그때 했던 말. 지금도 마찬가지니까."
너는 침묵을 지킨다. 기억이 난것인지 안 난것인지, 기억을 되살리려 애써 노력하는 중인지 감이 오지않는다. 너는 한참동안 미동없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굽혔던 등을 펴 내게로 몸을 기댔다. 살풋 네게서부터 긴 숨이 퍼져나간다. 풍경이 흔들린다. 내려쬐는 햇볕은 마냥 가볍다. 나른한 바람이 창틀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내게 주어진 무게가 얼마쯤일지 헤아려보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 세상이 날 두고 흘렀다. 몇 번이나, 계속해서.
잠에서 일어났을 때 세상이 변해있는 느낌은 아무리 여러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늘 새롭게 좆같았다. 잠에 든 지 몇 분 되지도 않은 느낌인데, 달력의 x표는 몇 개나 늘어있었다. 내가 일어났단 소식에 발빠르게 병실로 모여드는 동생들은 늘 자기 직전에 보았던 것보다 커있었다. 눈에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알 수 있었다.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초조하리만치 간격이 벌어지고 있었다.
꿈이라도 꿀 때면 난 미친듯이 출구를 찾아다녔다. 한시라도 빨리 다시 눈을 떠야만 했다. 망할 수마에 눈을 감은 것이 몇 초도 지난 일이 아닌 것 같지만은 그래야만 했다. 이렇게 서둘러 일어나보았자 필히 하루는 지나있을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꿈 속의 도로 위를 죽어라 달렸다. 이 밖에 나가보았자 아무도 없단 것은 알고있었다. 일어난 때가 어둑한 밤이면 홀로 외로이 거실에 앉아 티비 채널을 돌려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인 것도 알았다. 그래도 난 일어나야만 했다. 어느새 날 두고 멀어져가는 녀석들의 앞자리를 간신히라도 차지하고 있을 수 있도록, 나는 커야만 했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일어나야만 했다. 일어나야만 한다. 일어날 것이다. 난 일어날 것이다.
번뜩 눈을 뜬다. 달빛이 시리게 내 눈을 파고든다. 기운 달이 이제야 일어났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오늘도 혼자인 밤을 보내야하는구나, 속으로만 조용히 탄식하며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 영양제나 비타민제같은 것이 가득했다. 일어나면 목이 텁텁하니까 먹이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기어이 몇 알 목구멍에 집어넣은 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목이 굳은 것처럼 침 한 번 넘기기가 힘들었다. 물 한 잔 먹고, 티비를 보던가 만화책을 보던가 할까. 잠이 찾아들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나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복도를 가르는 희멀건 빛줄기에 발을 멈춘다. 닫힌 거실의 문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이었다. 도둑이라도 든 건가? 바짝 몸을 긴장시킨다. 어릴때에는 제법 싸움을 잘 했었는데, 맨날 누워있으니 온 몸이 바르작거리는 움직임밖에 내질 못했다. 어디가서 야구 배트라도 하나 주워올까. 쥬시마츠가 야구를 한다던 것 같았는-.. 생각을 이어나가는 도중에 거실 문이 열렸다. 환한 빛이 쏟아져나와, 조금 눈살을 찌뿌린다.
"..쵸로-, 아. 쵸로마츠네. 지금까지 안 자고 뭐해."
"..오소마츠? 형이야?"
"에, 응. 그런데."
넌 곧장 내게 안겨들었다. 금방 몸이 휘청여 넘어질 뻔 했으나 네가 바로 뒷걸음질 쳐 나머지 녀석들이나 부모님을 깨우는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넌 날 네 품에 구겨넣듯 안다가, 발갛게 물든 눈가를 하고는 날 올려다보았다. 비틀린 팔이 저릿했으나 분위기를 깨면 안 될듯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넌 눈동자를 굴리며 내 얼굴을 살피다가, 그대로 내게서 겨우 떨어져갔다. 옷을 걷어보면 네가 안았던 팔이 벌겋게 피가 쏠렸을게 분명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너는 불안한 듯 내 손을 쥐고는 물었다.
"배고프진 않아? 엄마가 형 일어나면 밥 해주라고 하셨는데."
"아, 그것보단 그냥 물 마시려고."
"그럼 저기 앉아서 기다려."
네가 내 심부름을 해준다니 정말 흔치않은 일이었다. 뭘 부탁해도 선뜻 들어줄 것 같은 이 분위기는 무서울 정도로 낯설었다. 찰랑이는 시원한 물이 컵에 부딪혀 내는 소리에 귀기울이다가, 탁자 위 자리한 교과서로 시선을 돌렸다. 보아봐야 하나도 모르겠는 말 투성이다. 이미 뒤처질대로 뒤처진 내가 이 교과서를 이해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이긴 하겠으나, 녀석이 이해하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하니 분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자."
"아, 땡큐. 근데 너 왜 안 자고 있었냐?"
"잠이 안 와서."
"잠이 안 와서." 라, 부러운 이야기다. 네 눈밑에 옅게 자리한 다크서클을 보니 너한테 그대로 말했다간 욕을 한 바가지로 처먹을 것 같아 굳이 소리내 말하진않았다. 너는 눈이 아프단 듯 몇 번 눈꺼풀을 껌뻑거리다가, 탁자 위에 놓여진 교과서를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난해한 일본어가 해석되지 않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느샌가 제 길을 찾아 책을 손에 쥔 녀석을 바라보다 물었다. "왜 공부하는 거야?"
"뭐, 당연하잖아. 시험보고 성적이 나오니까지."
"너 원래 그런거 신경 안 썼잖아."
"옛날에는 그랬지. 지금은 아냐."
아, 그렇구나. 나는 문득 허전한 옆자리에 미소만 겨우 띄어내었다. "헤에, 그래?" 짐짓 태연한듯 나가는 내 목소리가 부디 티나지않았길 빌었다. 사소한 거에 연연하는 놈으로 보이고싶지 않다. 내가 알던 너와 지금의 네가 다르단 사실에 동요한다고, 대놓고 티내면서 괜한 어리광을 부리고싶지 않았다. 너는 잠시간 말없이 샤프의 끝을 움직이다가, 뻐끈한 허리를 쭈욱 늘리며 대답했다. "그래."
"나라도 공부를 해야겠지."
"..에-." 길게 말꼬리를 늘리다가, 화살처럼 꽂혀드는 생각에 고개를 슬쩍 들어올리고 녀석을 보았다. 너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날 외면하고 있었다. 이대로 끝내주길 바라는 모양인지 뭔지, 어쨌든 간에 걸린 건 걸린 것이다. 놀릴 거리가 생긴 마당에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을까. 나한테 힌트를 줘버린 네가 나쁜거다. 곧장 입 밖으로 뛰쳐나가는 목소리가 내 귀에도 즐거워보인다.
"왜? 형아 나중에 먹여살려주려고?"
"아냐."
"맞잖아~? 와, 형아 일 안 해도 되겠다! 쵸로링이 돈 벌어와주는거지, 어른 되면?"
"망할. 아니래도 지랄이야."
"우왓, 입 험하잖아!" 장난스레 소리치고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3시, 남들은 다 자고있을 시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나 홀로 외로이 티비나 보고있을 시간이기도 했다. 녀석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 웃음짓는다. 아, 기쁘다. 이유도 정체도 짐작조차 가지않는 행복감이 가득 밀려와 속을 기분좋게 뒤집어놓는다. 사각사각, 옆에서 잡음없이 들려오는 샤프소리가 마냥 좋다. 손 안의 차가운 물잔에서부터 청명한 찬기가 손가락을 타고 전해져왔다. 네가 품어간 무게가 어느 정도인가를 겉잡아보다가, 살며시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