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쌍둥이/쵸로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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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두드리는 밤.육쌍둥이/쵸로오소 2020. 10. 2. 11:49
1. -쿵, 쾅! "또 시작이네 저거." 질렸단 듯 중얼거린 오소마츠가 근처에 있던 권총을 집어 들었다. 벌써부터 매캐한 화약 향이 나는 듯 했다. 구멍 뚫린 커튼 새로 엿보자, 어쩌다 냄새를 맽았는지 문 앞에 선 흉측한 몸체가 문에 몸을 부딪히고 있었다. 졸린 눈을 애써 부릅뜨며 신중히 조준하고, 쏜다. -탕. 아. 그제야 오소마츠는 주머니 속의 소음기를 떠올리고 작게 탄식했다. 어두운 밤중에 귀밝은 그것들이 이 소리를 놓칠 리 없다. "시발, 좆됐다.." 작게 속삭이고는 옆에 굴러다니던 쥬시마츠의 배트를 집어 든다. 그래. 오늘도-, 오늘도, 죽음이 두드려오는 밤이다. 2. "이제 슬슬 이사해야겠네, -냄새가 배었나봐." "거짓말이지, 벌써?" 질렸단 듯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는 토도마츠에, 쥬시마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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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천의 밤.육쌍둥이/쵸로오소 2020. 6. 2. 21:37
별이 총총히 박힌 하늘을 좋아했다. 구름 너머에 가리어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달과, 서늘한 공기, 조그맣게 반짝거리는 별빛들, 나즈막한 공기의 울림. 나는 그것들을 사랑해서, 수 천의 달과 마주보고, 수 천의 별과 함께하고, 수 천의 밤을 지새웠다. 내게 있어 밤이란 하루의 3분의 1 그 이상의 시간이었다. 나는 내가 커서 별을 관측하는 천문학자나, 별을 여행하는 여행자가 되리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한 번쯤은 그 미래를 의심해보고, 준비했어야 했다고 알았을 때는 진작에 늦어있었다. 별의 이름 옆에 작은 태그를 붙였다. 수많은 0이 뒤따르는 숫자가 그 위에 자리해있다.이치마츠가 그랬었지, 난 여행이나 하면서 유유자적 살 성격은 못 된다고. 나는 그 말에, 너야말로 누굴 가르칠 성격은 못 된다고 한 소리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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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절벽을 오른다.육쌍둥이/쵸로오소 2020. 5. 13. 01:37
"의미가 없잖아, 그거." 한심하단 듯 내리깐 시선에 엿을 날렸다. "그러는 형은 의미없는 이 짓도 안 하잖아. 아가리 여물어." "성질 사납긴." 성질을 사납게 하는 게 누구인데? 내 인생에 이 인간이 없었다면 분명 난 지금보다 3배 이상은 행복했을 것이다. 확신할 수 있다. 이 인간 때문에 망친 기회가 몇 번인가? 우선,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 했던 것부터가 아웃이다. 어쩌다 이딴 새끼한테 멱살을 잡혀가지고는. 한숨만 깊게 내쉬고는 읽던 문장을 마저 눈에 담았다. '3. 면접관의 의도를 파악하라'.. "그게 뭐가 유익하다고." "형 얼굴보다 유익해." "우리 얼굴 똑같지 않아?!" 그러니까 말이다. 거울 안에 똑같은 얼굴이 있는데 왜 굳이 찾아서 보냔 말이다. 동생에 미쳐있는 이 놈은 죽어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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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육쌍둥이/쵸로오소 2020. 4. 25. 22:47
1. 두 눈을 감아도 어렴풋이 보이는 시야가 지긋지긋했다. 흰색의 얇은 천 너머로 흐릿하게 비춰지는 앞이, 뒤가, 옆이. 쵸로마츠는 붕대 아래에 감춰진 눈을 약간 아플 정도로 붙잡았다. 연약한 안구가 비명을 지르듯 고통을 전해준다. 쵸로마츠는 침음을 삼키며 눈이 있을 자리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축축하게 제 손을 적셔오는 피눈물이 혐오스러웠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그 존재감이, 쵸로마츠는 미치도록 싫었다. 2. 또 충혈됬네, 괜찮아? 피로 물든 팔의 붕대를 풀어내며 오소마츠가 물었다. 쫑긋 올라온 귀가 까닥거리기에, 쵸로마츠는 그 걱정을 무시할 수 없어 대답했다. 괜찮아. 붕대를 풀어내면 어느새 눈 앞이 맑게 개듯 시야가 환해졌다. 오래간 빛을 못 본 눈이 부산스럽게 붉게 물든 시야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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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육쌍둥이/쵸로오소 2020. 4. 25. 01:22
눈이 떠졌다. 밖은 아직 해도 뜨지않은 새벽이었다. 사람의 평균 기상시간이 언제인지는 감이 안 왔으나, 내 옆에서 세상모르고 자는 인간이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은 이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어쩐지 따가운 눈가를 조심히 흝어내 시야를 선명히 했다. 방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넓은 공간, 킹사이즈라고 표현하기에도 큰 침대. 조금 떨어진 거리에 거울이 있었다. 그 안에서 부은 눈을 깜빡이는 것이, 아무래도 나였다. 아니 잠깐, 원래 자기 얼굴도 모르는 게 정상인가? 불안함이 목 뒤를 타고오르는 느낌에 기억을 더듬었다. 아니, 더듬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럴 기억이 없었다. 내가 어제 뭘 했더라?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인가? 내가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을 떠나, 머릿속이 텅 비어있었다. 내 기억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