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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눈을 감아도 어렴풋이 보이는 시야가 지긋지긋했다. 흰색의 얇은 천 너머로 흐릿하게 비춰지는 앞이, 뒤가, 옆이. 쵸로마츠는 붕대 아래에 감춰진 눈을 약간 아플 정도로 붙잡았다. 연약한 안구가 비명을 지르듯 고통을 전해준다. 쵸로마츠는 침음을 삼키며 눈이 있을 자리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축축하게 제 손을 적셔오는 피눈물이 혐오스러웠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그 존재감이, 쵸로마츠는 미치도록 싫었다.
2. 또 충혈됬네, 괜찮아? 피로 물든 팔의 붕대를 풀어내며 오소마츠가 물었다. 쫑긋 올라온 귀가 까닥거리기에, 쵸로마츠는 그 걱정을 무시할 수 없어 대답했다. 괜찮아. 붕대를 풀어내면 어느새 눈 앞이 맑게 개듯 시야가 환해졌다. 오래간 빛을 못 본 눈이 부산스럽게 붉게 물든 시야를 움직였다. 그 눈동자 너머에는, 오소마츠가 있었다. 늘 그랬듯 옅은 웃음이 맴도는 얼굴이다. 뭐가 그리 좋다고 웃는지. 오소마츠는 하루에 한 번, 쵸로마츠의 붕대를 갈 때 그런 표정을 지었다. 평소처럼 장난기가 가득 담긴 얼굴도 아니었다. 무언가, 옅지만 뚜렷한 감정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쵸로마츠는 그 감정의 이름을 명확하게 알고 있기에 더 궁금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비소도, 냉소도 아니었으니까. 붉은기가 도는 그 검은 눈동자에 한아름 품겨있는 그 감정은, 사랑이었다.
솔직히 하자면,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오소마츠와 쵸로마츠는 서로 사랑을 하고있는 연인 사이였고, 그렇기에 연인을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딱히 괴이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언정 쵸로마츠는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어째서, 나마저 싫어하는 내 일부를 그토록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가. 손에 잡히는 복실복실한 오소마츠의 꼬리털을 매만지면서, 어느 정도 엉킨 듯한 그것을 풀어내던 쵸로마츠가 머리로 전달되는 시야에 집중했다.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는다. 그 순간 빙그레, 눈 앞의 못된 여우가 상냥히 웃어보여서-.
3. 쪽, 가볍게 입술이 내렸다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쵸로마츠가 소스라치게 팔을 감싸며 몸을 물렸다. 놀랐다는 얼굴의 오소마츠가 눈에 담겼다. 지금 뭐하는 거야?! 황당함을 넘어서 약간의 당혹이 들어있는 쵸로마츠의 외침에 오소마츠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키스. 쵸로마츠는 아직도 온기가 생생히 남은 팔의 눈두덩이를 꼬옥 감싸며 소리쳤다. 왜 여기에 키스하는데? 마주 앉은 여우가 또, 못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마치 어린 날, 나뭇잎 사이로 훔쳐본 또래아이들의 웃음과 꼭 닮아있어서. 쵸로마츠는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넌 늘 그랬다.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한 주제에, 어린아이처럼 맑게 웃어보여서,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게 만든다.
4. 사랑스럽잖아. 내가 혐오하는 그것에 사랑을 말하는 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충혈된 눈이 다시금 아프도록 팔을 쥐고있던 쵸로마츠가 슬그머니 손에서 힘을 풀었다. 자, 팔 줘. 네 손길에 다시 팔을 맡겼다. 조금 느슨하게, 팔을 감겨오는 붕대의 감촉에 눈을 감았다. 수많은 눈을 감았지만, 오소마츠를 바라보는 안경 아래의 두 눈은 감기지 않는다.
5. 오소마츠는 천호였다. 1000년도 더 넘게 산 그는 발이 이리저리 넓고, 그만큼 찾는 이도 많은지라 여러 날을 집 밖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쵸로마츠는 방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오소마츠가 가져다주었던 책을 읽거나, 가끔씩은 밖에 나가 산보를 했다. 징그럽다 하여 경멸받는 도도메키와 달리 천호는 우대받았으니까. 쵸로마츠는 이 작은 산 밖의 도도메키들이 얼마나 고통받는지를 알았다. 오소마츠가 그를 거둬주기 전까지는 같은 처지였으니 겪어보았다가 맞는 말이리라. 같은 요괴에게마저 괴물 취급을 받는 것이 얼마나 뼈아픈 일이랴. 그렇기에 쵸로마츠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저 오소마츠를 기다릴 뿐이었다.
6. 왜 나였어? 쵸로마츠의 물음과 말은 항상 두서없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눈을 깜빡거린 오소마츠가 궁금하단 얼굴로 도로 물을 때까지, 쵸로마츠는 그 얼굴을 천천히 감상했다. 모든 걸 다 안단 듯이 구는 이 영악해빠진 여우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드물었으니까. 뭐가? 하는 그 물음에 조금 살을 붙여 다시 묻는다. 많고 많은 도도메키 중에, 왜 나였어? 오소마츠는 쵸로마츠가 하는 질문의 뜻을 깨달았다. 확실히, 궁금할 법한 이야기였다.
오소마츠가 쵸로마츠가 있는 곳을 찾았을 때, 쵸로마츠는 혼자가 아니었다. 인간들이 만든 여러 개의 철창 속에 갇힌 여러 명의 도도메키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짚을 엮어 만든 밧줄로 몸 여기저기를 결박당한 채, 죽은 눈빛을 바닥에 나뒹굴게 둔, 더이상 살 의지가 없어보이는 도도메키 한 마리. 오소마츠는 그곳에 있던 철창을 모조리 부숴버렸다. 그리고 힘없이 추욱 늘어진 쵸로마츠만을 품에 안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처음부터 목적은 그 하나뿐이었단 듯이, 그렇게 유유히 마을을 빠져나와서는, 집을 지어주고, 옷과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하루 종일 그 옆에 앉아 말을 걸었다. 쵸로마츠는 그렇게 지금의 쵸로마츠가 되었다.
7. 자신을 쫒는 여러 개의 눈동자를 느끼며, 오소마츠는 조그맣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대답했다. 손끝을 제 눈가에 가져가 톡톡 두드리며, 한없이 장난어린 투로 그는 말했다. 나는, 천리안을 가지고 있거든. 쵸로마츠는 굳이 다 아는 사실을 일부러 재상기시켜주는 오소마츠가 이해가 안 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게 뭐? 조급히 답을 구하는 쵸로마츠에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낸 오소마츠가 입을 열었다. 꿈을 꾸었어.
8. 오소마츠는 어느날 꿈을 꾸었다. 천리안이 보여주는 예지몽이었다. 꿈 속의 자신은 세상 행복한듯 웃으며, 눈 앞의 도도메키를 끌어안고 있었다. 붕대로 온 몸이 답답하게 가려져있어 제대로 된 얼굴도 이름도 모르겠는 그 도도메키 또한 자신을 보며 웃었다. 어디인지 모를 오두막이었고, 누군지 모를 도도메키였다. 그럼에도 그 풍경에서 전해져 오는 따스함을 뭐라 이룰 데 없이 깊고 달콤해서, 오소마츠는 홀린 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에서 깬 순간, 오소마츠는 자신이 머무르던 동굴을 영원히 나왔다. 이런 칙칙한 곳에 있을 여유가 없었다. 본디 미래란 것은 쉽게 바뀌는 법. 오소마츠는 결코 그 미래를 바꿀 마음이 없었다. 그 부드럽고 달콤한 순간을 꿈이 아닌 현실에서 마주하고 싶었다.
오소마츠는 그렇게 꿈 속의 도도메키를 찾아헤멨다. 이름도, 생김새도, 심지어는 태어났는가도 모르는 그 도도메키를 찾아서 전국을 돌았다. 그 여정 속에서 만난 이도 많았다. 산속의 텐구를 만나 그 괴상한 말솜씨에 웃었고. 나무 위의 네코마타를 만나 물고기 한 마리를 사다주기도 하였다. 폐가의 로쿠로쿠비를 찾아 함께 공놀이를 하였으며. 밤길의 설녀를 만나 그 손을 잡고 걸었었다. 간간히 쉬어가고, 걷고, 뛰고, 뒤졌다. 그렇게 전국곳곳을 헤집고 다닌 지 어언 200여년, 결국 그 끈질긴 천호는 꿈 속의 도도메키를 찾았다.
9. 그럼, 결국 하루밤 꿈에 나온 날 찾자고 200년을 나돌았단 말이야? 미쳤냐 너? 황당함이 깊게 어려있는 쵸로마츠의 물음에 오소마츠가 배시시 웃었다. 또, 그런 해맑은 웃음이지. 쵸로마츠는 더 할 말도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끈적한 물엿처럼 방안에 달라붙은 침묵을 겨우 뚫고 묻는다. 그래서,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어? 그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뜬 여우가 생각이라는 것은 필요없단 듯, 단숨에 대답했다. 당연하잖아, 그런거. 말 따위는 이 이상의 가치가 없단 듯이 고개를 가까이 하는 오소마츠에, 쵸로마츠가 그 붉은 옷자락을 잡아 단숨에 끌어당겼다. 맞닿은 입술이 초조하게 움직였다. 네 사랑의 크기가 알고싶어. 더, 더, 더.
10. 아아, 달콤해라. 꿈같은 기분에 오소마츠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제 몸을 이토록 깊이 취하고 있으면서도, 더욱 더 탐하는 그 욕망마저 사랑스럽다.
11. 쵸로마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제 옆의 오소마츠를 내려보았다. 고롱고롱, 코까지 골며 깊게도 잠든 오소마츠의 흐트러진 옷 사이로 붉게 물든 살갗이 보인다. 꽃이라도 핀 듯 발갛게 물든 자국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그 자리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자는 와중에도 민감한 감각은 여전한지 두 귀가 쫑긋거린다. 보드라운 볼에 짧막하게 키스한 쵸로마츠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붕대가 다 풀어헤쳐진 눈들이 바람이 따가운지 정신사납게 깜빡거렸다. 쵸로마츠는 두 팔을 들어, 군데군데 자리잡은 눈을 마주했다. 팔이 보이고, 눈이 보이고, 제 얼굴이 보였다. 수많은 시야가 제 머리속에서 깜빡거렸다.
지난 밤간에 나눈 입맞춤은 달았다. 쵸로마츠는 주로 오소마츠의 입이나, 그 여린 몸 위에 입술을 내렸었다. 오소마츠는 간간히 입맞춤에 응하거나, 그 사이사이에 손을 들어 쵸로마츠의 몸을 제 쪽으로 끌었다. 어깨에, 팔에, 볼 위에. 여러 자리에서 절 바라보는 수많은 눈들 위에 입맞췄다. 쵸로마츠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시야로 본 오소마츠는, 사랑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절 바라보고 있었다. 오소마츠가 입맞췄던 눈을 손끝으로 살며시 쓸어내렸다. 그럴 리 없음에도, 어쩐지 따스한 온정이 손에 잡히는 것만 같았다. 그 애정가득한 두 눈이 다시금 보이는 듯만 했다.
12. 쵸로마츠? 막 잠에서 깬 듯 꿈결에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부비며, 꼬리를 살랑거리는 그 모습에 쵸로마츠는 뒤돌아 사랑스러운 그 눈을 마주했다. 몽롱하게, 저를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는 눈동자. 아직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그 두 눈을 손으로 덮어가렸다. 조금 더 자. 약하게 밀어내면 순순히 밀려난다. 베게에 머리를 파묻고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오소마츠에, 쵸로마츠가 물었다. 왜 그래? 옅은 웃음을 입가에 걸친다.
사랑해. 간결한 대답에 쵸로마츠가 침묵했다. 온 몸의 눈이 깜빡거렸다. 화끈 달아오른 두 볼을 숨기려 고개를 돌린 쵸로마츠가, 그럼에도 여전히 시야에 있는 오소마츠에게 대답했다. 응. 간명한 대답 뒤에 가려진 말을 알기에, 오소마츠는 기분좋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13. 사랑하는 님아.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내 님아. 쵸로마츠는 창문 밖으로 어스름한 하늘을 오르는 새벽녘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고요히 잠든 검은 시야 위로 오소마츠의 얼굴을 그렸다. 정애하는 그 모습에 미소지은다. 쵸로마츠는 아직 따스한 난기가 남은 듯한 팔의 눈 위에 야트막히 입맞췄다. 조금씩, 오소마츠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듯 했다.
14. 100번의 키스를 해 줘, 내가 날 싫어할 수 없도록. 100번의 입맞춤을 해 줘, 내 미움이 네 사랑에 가리도록. 더 많은 애정을, 더한 순정을 내게 쏟아 줘. 나의 혐의가 깔리고, 짓물리고, 형태를 알아볼 수 없으리만치 으스러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