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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절벽을 오른다.육쌍둥이/쵸로오소 2020. 5. 13. 01:37
"의미가 없잖아, 그거."
한심하단 듯 내리깐 시선에 엿을 날렸다.
"그러는 형은 의미없는 이 짓도 안 하잖아. 아가리 여물어."
"성질 사납긴."
성질을 사납게 하는 게 누구인데? 내 인생에 이 인간이 없었다면 분명 난 지금보다 3배 이상은 행복했을 것이다. 확신할 수 있다. 이 인간 때문에 망친 기회가 몇 번인가? 우선,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 했던 것부터가 아웃이다. 어쩌다 이딴 새끼한테 멱살을 잡혀가지고는. 한숨만 깊게 내쉬고는 읽던 문장을 마저 눈에 담았다. '3. 면접관의 의도를 파악하라'..
"그게 뭐가 유익하다고."
"형 얼굴보다 유익해."
"우리 얼굴 똑같지 않아?!"
그러니까 말이다. 거울 안에 똑같은 얼굴이 있는데 왜 굳이 찾아서 보냔 말이다. 동생에 미쳐있는 이 놈은 죽어도 이해 못 할테다. 중얼중얼. 꿍얼꿍얼. 귀에 맴도는 노이즈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다가, 자세를 고쳐앉다가, 책의 끝부분을 구겨트리고 결국 책장을 덮었다. 시발, 진짜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를 않아.
"뭐가 그렇게 문제야, 형은? 맨날 탱자탱자 놀려면 혼자 놀아, 남 발목 잡지 말고!"
"에, 잡은 적 없는데."
"잡고 있잖아?! 지금 옆에서 시끄럽게 굴면서!"
"진짜 없다니까. 안 움직이는 걸 뭐하러 잡아서 멈춰?"
미친 새끼가.
눈이 돌아가서 멱살을 잡고 몇 분이나 처박고 싸웠다. 물론 처맞은 건 나였다. 저 새끼야 뭐, 턱에 멍 하나 든 거 빼곤 멀쩡했다. 옛날부터 싸움으로 이기질 못 해서 그럴 줄 알고있었다. 그래도 맞은 곳은 영 아팠다. 욱씬거리는 어깨를 문지르고 있자니, 바닥에 반쯤 누운 꼴로 앉아있던 네가 홀린 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또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고 있으니까."
"뭐라고?"
"-알고 있다고."
"뭘."
"아. 그러니까, 알고 있다니까. 취직해야지. 자립도 하고, 집 나가서 직장 다니고, 스스로 벌어서 스스로 살아야 된다고."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한 마디 얹고 싶었다. 웬일로 정상적인 생각을 다 하냐, 정신 차렸냐 같은, 나다운 말을 하고 싶었다. 혀가 굴러가지 않아 하질 못했다. 입 안이 바싹 말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무서웠다.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 오소마츠 형이 이런 말을 해? 이렇게 생각하며.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의 심각한 느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분명 좋은 일인데. 이 망할 독재자가 먼저 신분상승을 꿈꿔주는 것은 분명 바라던 일이었을텐데.
너는 집요한 내 시선을 피해 창가로 얼굴을 돌렸다가, 인위적인 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뭐, 그래도 역시 내일도 놀고싶잖."
"그럴 줄 알았다. 맞아서 정신차린 줄 안 내가 병신이지."
그럴 줄 알기는 개뿔. 무서워서 뒤질 뻔 했다.
너는 너털웃음을 짓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치비타네 들렸다 올 거라 늦어, 먼저 자." 작작 처마시라고 욕을 하면서도 머리 한 켠은 복잡하게 얽혀서 풀릴 줄 몰랐다. 알고 있다니, 그래. 그건 알고 있었겠지. 성인이 되면 취직을 하고 집을 나가 자립해야 한단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않는가. 그걸 이 니트새끼가 안다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렇게, 충격적인지.
너는 내가 당황한 줄 알았을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알았을 게 분명하다. 마츠노 오소마츠가 날 모른다는 게 가능할 리 없지. 손가락 끝에 걸쳐진 책장을 만지작거리다가, 벽쪽으로 밀어냈다. 책 표지가 다다미에 쓸리는 소리가 난다. 읽고싶지 않았다.
찝찝한 기분은 밤이 되도록 이어져, 불을 다 끄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후에도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가만가만 눈을 깜빡이며, 수마가 오기를 기다렸다. 어쩌면 그 수마가 붉은색 파카를 입고 오기를 바랐던 것 같기도 하고. 실없는 생각이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내가 네 얼굴을 본 것은 햇볕이 쨍쨍하게 드는 아침이었다. 너는 쥬시마츠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드물게도 얌전히 잠에 들어있었다. 시침이 아침 9시를 가리키고 있길래 먼저 방을 빠져나왔다. 거실에는 나와 형 빼고 모두가 먼저 모여있었다.
"아, 일어났어?"
"응. 깨우지 그랬어."
"마지막에 일어나는 사람이 이불 정리니까, 깨우고 싶을 리 없잖아."
이기적인 새끼들. 지들끼리 마주보고 켈룩켈룩 사악하게도 웃는 꼴들을 짠 눈으로 바라보다가, 방을 나왔다. 계단이 삐걱인다.
"..오소마츠 형."
살짝 동공이 수축한다. 눈에 담기 무섭게 순식간에 풀어져서, 아직 꿈인가 하고 무심코 착각한다.
"아-, 좋은 아침.. 쵸롬츄도 방금 일어났어? 잠옷 차림이네."
"..응. 형은?"
"방금 막. 어제 술 마셔서 그런가 일찍 깼네."
거짓말이다. 마츠노 오소마츠가 날 모를 리 없듯, 마츠노 쵸로마츠가 널 모를 리 없다. 방금 그 표정으로 봐서는 넌 방금 깬 모양이 분명했다. 다 보이는 거짓말이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지, 안 먹힐 줄 알면서도 한 번 속여보는 건지. 어느 쪽이든 간에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거짓말이라니, 농담이면 모를까. 그게 우리 사이에 어디 흔한 일이었는지.
어제 일이 떠올랐다. 나는 숨을 죽이고 네 옆모습을 살폈다. 너는 시선을 다른 데로 하고는, 멍하니 눈을 깜빡인다. 딱딱하고 차갑게만 보이는 눈알의 겉면을 흝어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따뜻하던 것과는 달랐다. 나는 네 눈이 차갑게 식은 줄 알았으나, 외면했다.
그 후로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모여앉아 아침을 먹고, 하나둘 집을 나갔다. 나 역시도 집을 나섰다. 이전에 사놓은 라이브 티켓에는 오늘짜 날짜가 적혀있었다. 그렇게 마음이 심란했는데, 또 가서는 잘 놀았다. 신나게 소리나 지르고, 무대의 그림자 아래서, 반짝거리는 조명 빛에 손을 담그며, 생각없이. 마냥 또 그렇게.
한참을 뛰어서 더운 목에 손부채질을 하며 집에 돌아와보니, 네가 코타츠 아래 앉아 깔깔대며 티비를 보고있었다. 정말,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지. 안심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모든 게 바뀌기를 염원했던 나는, 아이러니할만큼 안심했다. 나갔던 놈들이 저마다 다른 길로 집으로 귀가하고, 다시 작은 상 위에 오밀조밀한 반찬그릇을 모아놓고, 남정네 여섯이서 모여앉아 저녁을 먹는, 질리도록 의미없고 변함없는 일상. 그날 저녁, 너는 평소와 다름없이 가벼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아, 그러고보니까 나 내일부터 집에 없어."
"에-? 내일부터? 로또라도 당첨된거야? 여행?"
"아니~. 그게, 슬슬 일할까 해서."
말소리가 잦아들고, 부엌 쪽에서 젓가락과 숟가락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감격한 얼굴을 하고는 거실 안으로 뛰어들어와 널 끌어안았다. "우와?! 이렇게까지 반길 일이야?!" 당황한 어조. 다른 형제들도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잘못 먹은 건 아니냐, 너같은 새끼를 누가 받아주더냐, 등등. 거기에 끼어서 몇 마디 보탤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그럴 정신이 없었다. 네가 취직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지. 마츠노 오소마츠가 취직했다 란, 내 머릿속에서는 성립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글쎄, 일본 어딘가의 다른 마츠노 씨나, 다른 오소마츠라면 모르겠는데. 마츠노 오소마츠가? 누가 그걸 진짜라고 믿는데? 하지만 진짜였다. 데카판 박사와 우연히 마주해, 일자리를 추천받았다고. 내일 견습하러 간다며 말했다.
"어디인데?"
"아, 규슈."
"규슈?! 완전 머네~!"
"그치? 그쪽 친구네 집에서 잠깐 신세지면서 집도 알아보고 오려고-. 아마 3일 뒤에는 올 듯?"
말이 중간에 느려진 건 나와 눈을 마주쳐서다. 의식되고 있다니 불행 중 다행인지, 내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내 쪽을 향하는 조심스런 시선들에 틈이 남지않게 단단히 입술을 다물었다. 이건, 저번 자립시도 때와 사람만 바뀌었을 뿐 똑같지 않은가. 말들이 혀 아래에서 간지럽혔다.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다. 뱉어내고 싶었다. 나를 두고, 떠나는 거냐고.
너도 그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아니었겠지. 넌 내가 정말로 이 집을 떠나, 내가 백날천날 노래부르던 삶을 실현시킬 용기가 없단 걸 알고 있었을테다. 내가 언젠가 이 집에 다시 돌아오리란 걸 알고 있었을테다.
하지만, 형. 내가 생각하기에는, 형은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데. 날 두고 정말 가버릴 것 같은데. 모든 게 정리됐단 듯, 미련없이 떠나버릴 것처럼만 보이는데.
마츠노 쵸로마츠가 널 모를 리 없었다. 너에 관련된 일에 한해서, 내 예상은 늘 예상이 아닌 미래였다.
목욕탕으로 가는 길, 불이 깜빡거리는 가로등 아래서 넌 쓰게 웃었다. 악지르며 눈물을 쏟아내고 싶은 것을 참아내며 물었다.
"규슈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 거지?"
"그래야겠지? 자립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니까."
"..그럼, 우리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소리가 형편없이 떨린다. 바랐던 일이었다. 우리가 자립하고, 정상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제 겨우 비로서 그렇게 될 스타트를 끊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왜 부서질 듯 아픈지.
"-알고 있었어."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눈은 내 눈 못지않게 일그러져 있었다.
"언젠가는 취직을 해야겠지. 언젠가는 자립을 해야겠지.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 언제까지고 놀고야 싶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그러고 싶은 거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깜빡이던 가로등에 온전히 빛이 차오른다. 한껏 뒤틀렸던 눈동자에서, 조각 하나가 떨어져나와 네 볼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입술 끝이 올라간 모양새가 썼다.
"언젠간 이렇게 될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있고 싶더라고. 그냥."
나는 불빛이 들어온 거리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울었다. 너는 날 안아주지 않고, 등만 하염없이 토닥여주었다.
찬 달빛이 드는 밤에, 또 나 홀로 잠이 오지 않은 눈을 뜨고 있었다. 취직이며 자립이며 노래를 불렀던 지난 날들을 떠올리며.
너는 알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말하는 것들을 이해하고, 고민하고, 준비하고 있었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나도 생각하지 못하던 것들을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던 것들을 고민하고 있었다고. 너는 내가 재촉하지 않아도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달콤한 생활의 끝을, 다가올 새로운 시작을, 우리의 관계의 마지막을.
내가 널 모를 리 없었으므로, 난 알 수 밖에 없었다. 너에게도 이것은 칠흑같은 어둠처럼 무섭고, 슬픈 것이었으리란 걸.
그런 너에게, 오늘로 오기까지의 시간은 얼마나 차가운 밤이었을까.
나는 또 얼마나 캄캄한 절벽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