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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파란에 잠겨죽기를앙스타/와타에이 2025. 3. 21. 12:28
와타에이
210714
숨이 가빴다. 찬 바닷물에 담궈져있던 그의 손이 미지근하게 느껴져서, 텐쇼인 에이치는 제 얼굴빛이 꼴사나우리만치 창백할 것임을 알았다. 희고 얇은 손가락이 제 입술을 스친다. 파르르. 떨리는 것은 그인가, 나인가? 그것도 아니면 둘 사이를 매개하는 무언가인가? 뒷목에서부터 올라온 열이 머리를 잠식해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 속에서 미온한 온도도 달가워 에이치는 젖은 손을 붙잡고 얼굴을 부볐다. 빙글, 빙글, 파도가 발목에 부닥쳐 온다.
"-에이치. 정신 차려요."
부드러운 목소리. 품에 안겨드는 몸을 밀어내는 다정한 손길. 그게 잔인하게만 느껴져서, 에이치는 흐느끼며 울었다. 죽어가는 몸뚱아리가 삶의 극지에서 정신을 으스러트린 탓에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슬픔에 잠겨 운 것은 초등학교 무렵 이후로 처음 아닐까. 에이치는 엉망진창이 되었을 얼굴을 보이기가 두려워 고개를 숙였다. 다 큰 성인이 애마냥 우는 게 얼마나 꼴사나워 보일지. 그러나 그의 사랑스러운 인어는 마냥 속상하다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에이치, 우는 얼굴은 처음 보긴 하지만요. 전 역시 웃는 얼굴을 좀 더 좋아한답니다. 그만 울어요. 에이치, 정신 차리고.. 바다로 더 들어왔다간 당신, 저체온증으로 죽을지도 몰라요. 수온이 차니까요. 육지로 갑시다. 당신이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곳으로..
시야가 점점 바다 저 끝에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제 몸을 단단하게 안은 그가 육지로 헤엄쳐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래야겠지, 사지말단이 파랗게 질리고 딱딱해진 것을 보아 바다에 더 있다간 동상에 걸릴 것이다. 그러나 텐쇼인 에이치는 저들끼리 부딪혀도 깨질듯이 아픈 손가락으로 은색 머리카락을 한껏 움켜쥐었다. 따스한 보라색 눈동자가 절 향한다.
"-나 혼자?"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아니면 난감한 기색을 삼키는지, 또는 터무니없는 요구에 기가 막히는지. 그는 한참동안 말없이 육지를 향해 헤엄쳤다. 어깨께까지 차올랐던 수면이 허벅지쯔음에 다다르고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사람을 불러오세요, 에이치."
"..어째서?"
"그야, 에이치는 절 안고 집까지 데려갈 수 없으니까요?"
와타루는 변함없는 미소로 그렇게 물었다. 친절에 질식한다는 건 이런 말일까. 에이치는 숨이 턱 막혀오는 와중에 백사장을 달렸다. 달달 떨리는 다리가 휘청였고, 살을 에는 바람이 몸을 밀어냈지만, 그래도.
*-*-*
텐쇼인 가가 대대로 몸이 약하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텐쇼인 에이치는 그것이 유독 심했다. 여름이니 겨울이니 하는 것에 맞춰 지구를 반바퀴씩 돌아야 했으니, 그 '심하다'의 정도를 굳이 더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는 작렬하는 태양이나, 흩날리는 눈발같은 것을 본 적은 손에 꼽았으며, 겨울의 창백한 바다 따위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단 말이다. 태어나서 스무살, 성인이 되도록 단 한 번도. 에이치가 굳이 북지방의 인적드문 바닷가에 별장을 사들인 이유는 그러했기 때문이다.
올해 겨울에는, 파도가 얼어붙는 걸 보고싶어.
물론 시시각각 밀려갔다가 몰아치는 파도가 얼어붙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므로, 그것은 순전히 생떼에 불과했다. 부친을 골방에 처넣고 텐쇼인 재단을 한 입에 집어삼킨 그의 안하무인한 갑질인 것이다. 텐쇼인 가의 사용인들은 에이치가 두꺼운 겉옷을 입고, 담요 두 겹을 가지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솜이 가득 찬 옷가지들을 두른 채 테라스에 나와 따뜻한 홍차 한 잔을 들 때까지 바다에 얼음 서너트럭을 갖다 부어야 했다. 그러면 파도가 칠 때마다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찰그랑, 찰그랑, 하고 났다. 텐쇼인 에이치가 있는 백사장 너머의 테라스는 물론이고, 해변가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대륙사면-바다에서 급격히 수심이 깊어지는 구간-까지도.
얼음 부딪히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다면, 그 집합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을 낼 지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수면을 치는 소리와 더불어 청명하게 울려퍼지는 그 소리가 와타루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하는 따분하고 진부한 흥미 한 조각을 품게 하기에는 충분한 명분. 그가 얼음 조각 사이에 머리를 내밀고 바깥을 살핀 건 그래서였다. 하얀 파도가 부서지며 얼음 몇 조각이 백사장에 원석처럼 박히는 꼴을 유쾌하게 바라보던 에이치가 그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작은 비명을 질렀다. -우와.
"인어라는 거, 실제로 있는 거였구나."
하고, 어디 지나가는 개도 비웃을 소리를 하면서.
*-*-*
"안녕. 춥지 않니?"
들은 적이 있었다. 어딘가에는 자신처럼 물고기 꼬리를 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 날개를 단 사람도 있다고. 발바닥으로 땅을 딛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믿는다고. 와타루는 그 '천사'라는 것을 조금 이해할 것도 같았다. 희고 성스러운 무언가. 금방이라도 증발해 사라질 것 같은 옅은 색채. 그러나 백금색 속눈썹이 사붓거리는 아래 자리한 두 눈동자는 맑고 선명했다. 그가 흩어져 날아간다면 눈동자만 뚝 떨어져 바닥을 구르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창백한 겨울의 백사장에서 하이얀 사람은 그렇게 물었다. 바다 깊은 곳에서 살던 그에게는 상황과 개연성을 고려하고도 춥다 말하기 뭐한 수온이었으므로, 와타루는 깔끔히 무시하고는 미리 생각해온 질문을 건넸다.
"당신이 여기 얼음을 띄었나요?"
"맞아. 그러라고 했어. 네게는 폐를 끼친 것 같네."
"전혀요! 오히려 무척 좋은 노래를 들어 기분이 좋답니다. 아름다운 발상이네요."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과분한걸."
에이치는 구멍이 송송 뚤린 잿빛 바위 위에 담요를 깔았다. 고급 원단으로 되어있어 바닷물에 적시면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만은, 그것은 에이치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와타루 역시 꼬리 끝을 살짝 수면 위에 띄우고, 바위에 몸을 붙였다.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지도, 무턱대고 잡아채려는 반응도 아닌 것이 새롭고 달가웠다. 와타루는 난생 처음으로 아주 오래 수면 위에 머물렀다. 해가 중천에 떠있던 때부터 하늘이 빨갛게 저물 때까지였으니, 빈말로라도 스쳐지나가는 인연은 못 되었다. 날개가 달렸든, 달리지 않았든, 사람과 제대로 된 관계를 지어보는 것은 처음이라, 와타루는 두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일도 나와주시겠어요? 못다한 이야기가 많으니까요."
"나야 환영인걸. 혹시 얼음도 띄워야 하니?"
"그런! 노래는 괜찮아요. 당신 목소리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랍니다♪"
에이치는 청량하게 웃었다. 그 말대로, 바다에 만연하던 얼음 부딪히는 소리만큼이나 곱고 맑은 울림이었다.
*-*-*
"-텐쇼인 에이치, 당신.."
"아,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원래 몸이 좀 약해서, 이런 건 익숙하니까."
"그래도요. 오늘 나와도 괜찮은 거였나요?"
"나오겠다고 약속했는걸."
그 말은 나와도 괜찮은 상태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들 입만 아픈 꼴이 될 듯 해서, 와타루는 그 대신 손에서 물기를 최대한 털어낸 후 에이치의 담요를 더 꼭 여매주었다. "오늘은 얼음이 없어서 다행이네요." 바람이 불어도 어제보다는 덜 찰 것이다. 에이치는 발간 볼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와타루는 그가 내쉬는 숨이 얕고 떨리는 것이 염려되어서 부러 더 조잘조잘 입을 움직였다. 자신이 말하면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경험마저도, 한없이 고요한 바다의 정적에 익숙해져 있던 와타루에게는 충분히 기뻤다.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바닷가에 트럭이 왔다갔다 하는 일은 없었으나 바람은 점점 싸늘해져만 갔다. 한겨울이 오고 있는 것이리라. 와타루는 이제 손이 마르는 감각이 익숙했다. 그가 얘기하는 동안 목 끝까지 올려두었던 옷자락이 조금 내려가면 그걸 끌어올려주어야 했기에, 와타루는 그와 얘기할 때면 언제나 손을 말리고 있었다. 그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식으로 챙기고 나면 에이치는 늘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러면 말하기가 불편해." 그래요, 그래요. 아이를 달래듯이 대답한 와타루가 바닷바람이 흝고지나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제가 더 많이 말하면 되니까요." 그것에는 불만이 없는지, 에이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외투 아래 가려진 입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것 같았다.
점차 육지에 가까워져가는 만남 장소와, 한층 더 두터워져가는 옷에도 에이치의 안색은 점점 희어졌다. 옛날같으면 바닷바람에 스러져버릴 것 같다던지, 그런 소리를 했을텐데. 와타루는 더이상 그런 감상을 내놓지 않았다. 그런 얼굴을 하고 제 이름을 부르는 에이치의 목소리가 얼마나 밝고 분명한지를 알았다. 삶을 향한 그의 열망과 집착을 알았다. 그처럼 삶을 갈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그처럼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사는 사람도 없었다. 때문에, 와타루는 에이치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때때로 기침을 콜록이면서도, 지금 이대로를 언제까지나 버틸 수 있다고 무심코 믿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나, 내일부터는 나오기 조금 힘들지도 몰라."
그 말에 무언가가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제 심장이 아니었을까. 전혀 예상치 못한 통보에 피가 빨리 도는 것을 느낀다. 어색하게-대기의 산소를 직접 폐에 들이붓는 것은 그에게 생소한 일이었으므로- 숨을 들이쉰 와타루가 물었다. "어째서요?" 크게 벌어진 아가미가 물 속에서 뻐끔, 뻐끔, 움직였다.
"말했지만, 몸이 조금 약하거든.. 사실 지금처럼 매일 밖에 나와 시간을 보낸다는 건 패기에 가득차서 벌인 짓이었으니까. 아마 업보라도 치르는 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업보라면 벌써 치르고 있는 것 같은데요? 지금도 충분히 괴로워보여요."
"그래? 그렇다면 큰일이네.. 너랑 있으니까, 아픈 줄도 모르고 있었어."
에이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제 체온을 가늠해보려는 듯 목 옆쪽에 손바닥을 붙였다. 짠 바닷공기가 채도낮은 속눈썹을 뒤흔든다. 바람을 막아줄 수 있으면 좋을텐데. 와타루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그와 눈높이를 맞추려면 저도 바위 위에 올라가 곁에 앉아야 했으나, 그러면 그가 바닷물에 축축히 젖을테니 그럴 수는 없었다. 다만, 앞으로는 당신과 만나기 힘들겠습니다, 하는 의사를 전하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려서, 오히려 자신이 거절을 하는 듯한 착각에 휩싸일 정도로 아파서, 와타루는 넌지시 물었다.
"그러면 텐쇼인 군의 상태가 괜찮아지면 만나는 걸로 할까요?"
"어떻게? 연락할 수단이 없는걸."
"그럴 리가요. 우리가 처음 만난 날에도 당신은 절 불러냈답니다."
아. 나지막히 탄식하고는 에이치는 미소를 지었다. 찰그랑, 하는 소리가 기억 너머 멀리서 울려퍼졌다.
*-*-*
와타루가 에이치를 다시 만난 것은 그 후로 한달이 지나고서였다. "그렇게 헤엄치다 보면 얼음조각에 다치지는 않니?" 걱정어린 목소리로 묻는 것에는 대답하지 않고 내민 손을 덥석 붙잡았다. 차가운 체온에 놀랐는지 손끝부터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와타루는 개의치 않고 나머지 한쪽 손도 붙들고 따뜻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다문 입 안에서 정돈되지 않은 말들이 맴돌았다. 외로움, 정적, 당신의 체온, 얼음 부딪히는 소리만을 기다렸던. 그 말들을 적절한 연결사를 찾아 이어붙이고, 가지각색의 미사여구를 붙여 온전히 제 마음을 전할 자신이 없었다. 때문에 와타루는 차디찬 제 볼을 부드러운 손에 밀어붙였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외로움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모든 것들에 둘러쌓여 버틴 한달이 끔찍했다.
"에이치."
검은 바다 속에서 수백 번 불렀던 이름자. 당신이 이런 날 보고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두려웠다. 공허에 눌려 무너져내리고, 당신의 이름자를 외우며 외로움을 견뎌왔던 나를. 이따금씩 참을 수 없는 고독에 수면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당신이 없는 흰 테라스를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었던 나를. 와타루는 두려웠다. 따뜻한 손에서 얼굴을 들면, 당신의 푸른 눈이 겨울의 바다보다 더 차갑게 날 경멸하고 있지는 않을련지. 그렇게 생각하면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얼음이 띄워진 바다에서도 전혀 추위에 떨지 않던 몸이 달달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은 날 좋아하죠. 그러나 에이치, 당신이 좋아하는 건 어떤 나인가요? 유쾌한 목소리로 화려한 1인극을 펼치는, 각종 기예로 눈을 사로잡는,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게 바다를 떠도는-.. 당신이 좋아하는 나는 그런 나이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이런 나는 싫어할까요. 조각조각나서, 당신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나는.
무언가가 수면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얼음 몇 조각이 제게 떠밀려와 꼬리에 부딛혔다. 와타루는 얼음물이 스민 검은 바지를 바라보았다. 에이치가 얼음이 잔뜩 떠밀려온 차가운 해안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와타루와 눈높이를 맞춘 것이다. 그러고 그는 찬 바람이 그들 사이를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가까이 붙어, 살며시 이마를 붙였다. 흰 파도가 그의 바짓자락을 물고 흔들었다. 기이하리만치 심장이 뛴다. 온화한 푸른 눈동자 안에 저가 있었다. 상냥한 얼굴, 손길, 목소리. 에이치, 당신은 그렇게 날 부른다.
"-히비키 군."
머리가 새하얗게 물든다. 한없이 사분사분한 음성과 달리 밀려온 호칭이 멀어서, 그 적당한 거리감에 숨이 막혔다.
*-*-*
텐쇼인 에이치의 아침은 안개가 부옇게 낀 초봄 같았다. 차갑고 축축한 느낌. 새벽에 느릿하게 눈을 뜨고, 식도 끝까지 역류하는 위액이나 밀려오는 두통 따위를 견디다가, 옆 탁상에 높인 미적지근한 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고는 흰 커튼 너머에 어른어른 비치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다. 철썩, 철썩, 하며 유리창문의 틈에서 희미하게 새어들어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일어났나요, 에이치?"
-그 일상 속에, 이런 소리는 없었는데. 에이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보송보송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마른 머리카락을 한 와타루가 침대에 상체를 기대고 있었다. 단추가 잠궈지지 않은 흰 셔츠의 소매가 시트 위에 늘어져 있다. 물 밖의 물고기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하여 상상하니 조금 머리가 아찔했지만, 그 대신 에이치는 목을 가다듬고 인사에 답했다.
"좋은 아침이야, 히비키 군."
"좋은 아침입니다, 에이치! 당신이 눈을 뜨기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오늘이 며칠인지 맞춰보시겠어요?"
"글쎄.. 쓰러진 날로부터 이틀 정도 지났으려나."
"한참 잘못 짚으셨네요. 5일이랍니다♪"
"아. 좀 크게 값을 치뤘네."
정말 그랬다. 사랑하는 제 인어를 만나 품에 안긴 것까지는 만족스러웠으나, 그 대가로 5일을 잃다니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시간은 비가역적이고 유한하다. 몸이 허약한 제게 그 사실은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5일이면 와타루를 5번은 더 만나볼 수 있었을 거야. 명백히 손해지. 그리고 에이치는 사업가로서 손해를 보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장장 5일이나 꾼 꿈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고자, 옆에 있던 와타루의 머리를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생각보다 제 머리는 훌륭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와 입을 맞춰본 적이 없는데, 꽤나 그럴싸한 첫키스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혀를 얽어매는 와타루의 숨이 따스했다. 그와 있을 때 온기를 느끼다니, 에이치는 이것도 퍽 생소하다 싶어 와타루의 어깨를 밀어냈다. 이 이상 제 머리가 날조와 주작을 거듭하기 전에, 분명하게 선을 그어놔야할 것 같았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망상 투성이네. 이건."
"..네?"
"난 물론 인어가 아닌 너도 좋아할 거야.. 네가 내 집에 머물러준다면 그야 기쁘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는단 걸 알아. 현실의 넌 결코 닿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입을 맞춘다던가 하는, 황홀한 일은 말이야. 아무래도 터무니없고,"
"저기, 에이치. 좋고 기쁘다면 그걸로 괜찮으니까요. 일단 마저 할까요?"
"응?"
찰박, 하는 소리가 나 에이치는 침대 밑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물고기의 은색 비늘 몇 개가 카펫 위에 어지러이 널부러져 있고, 그 위에서 바싹 마른 꼬리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와타루가 입술을 가볍게 붙여와서는 깊게 파고드는 동안 에이치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히비키 와타루를 말라죽게 하는 상황을 꿈으로 꿀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가? 꿈은 무의식의 산물, 욕망의 거울이라고들 하는데, 아무리 제 곁에 두기 위해서라지만 저런 말도 안 되는 설정을 채용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다시 생각해보니, 꿈 속의 사람이 제게 며칠이 지났는지를 알려주는 것부터가 기이했다. 자신은 아직 자고 있을텐데..
그제서야 에이치는 이 모든 게 현실임을 깨달았다. 셔츠를 흐트러트리는 손길을 밀어내고, 다급하게 사용인을 불렀다. "-히비키 와타루!" 원망어린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자, 와타루는 버석거리는 꼬리를 살랑이며 웃을 뿐이었다.
*-*-*
"안 돼."
"왜죠? 당신, 기쁘다면서요! 제가 이 집에 머문다면 기쁠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건 네가 인어가 아니었을 때의 이야기야. 우리 집을 바다 속으로 옮기고, 나를 포함한 사용인들이 365일 내내 잠수복을 입고있을 수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걸 실현한다면 그거야말로 문제죠.. 저기, 에이치. 그냥 이대로 살면 별 문제 없을 것 같은데요."
"그 좁은 욕조에서? 바다에 살던 네가?"
"이 공간에 좁다는 형용사가 붙는 게 맞나요?"
그 말대로, 별장의 욕실은 단순히 몸을 청결하게 하고자 하는 공간으로는 지나치게 컸다. 욕조는 바닥에 앉으면 적당히 목까지 차오르는 깊이인지라 조금 얕은 감은 있었지만, 반신만 물에 담궈져있다면 그럭저럭 생존에는 별 문제가 없었기에 충분했다. 꼬리를 흔들 때마다 끝에 바닥이 닿는 것이 퍽 어색했지만 그야 익숙해지면 될 일이지. 그러나 에이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지난 날 저를 데려온 일을 두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벌였다는 둥, 후회한다는 듯한 뉘앙스로 말하기도 했다. 와타루를 직접 여기까지 안고 모셔온 사용인은 대단히 큰 액수의 돈을 받고 해고당했다고 하니, 이쯤되자 와타루는 내심 섭섭하기까지 했다.
"에이치, 혹시 제가 부담되나요?"
"히비키 군이? 그럴리가. 난 그저 네가 걱정될 뿐이야."
"제가 말이죠. 그럼 제 안녕을 위해 에이치는 어디까지 해줄 수 있으신가요?"
"-물론, 얼마든지."
"그럼 결정됐네요. 당신은 제게 책임감을 가지고 잘 길러야겠어요."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니? 눈으로 쏘아보는 모양새가 딱 그 느낌이었지만, 입으로는 내지 않았다. 그마저도 어린애가 하는 투정에 가깝다. 에이치가 진심으로 싫어하지 않는단 사실을 알기에 와타루는 더없이 자신만만하게 요구할 수 있었다. 결국 당신은 꿈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내가 곁에 있는 것을 바라왔으니까, 그렇다고 고백했으니까. 그런 열렬한 사랑을 줘놓고 외면하라니? 그것도 히비키 와타루에게! 그야말로 생선을 고양이에게 맡겨놓은 꼴이다. 때문에 와타루는 노래하듯 속삭였다.
"에이치, 말씀드렸을 텐데요. 제게 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려준 건 당신이에요. 전 당신이 노래하는 세상에 매료되었어요. 믿을 수 없다고 하신다면, 그게 바로 놀라움과 사랑의 힘이라고밖에 설명드릴 수 없네요. 하지만 에이치, 원인과 결과가 모두 딱딱 맞아떨어진다면 그걸 어떻게 인생이라 부를 수 있겠어요? 당신은 바다에 심술을 쏟아부었을 뿐이지만 나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었고, 당신은 그 추운 바다에서 삶을 잃어갔을지 몰라도 난 그동안 삶을 쥐었어요. 당신을, 동경하게 되었어요.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에 그 이름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자아, 전 사랑에 인생을 바친 가련한 사람이랍니다. 당신은 그 생의 수신인으로서 절 소중히 키워야 할 거에요..♪"
에이치는 말없이 수면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파원이 손끝을 좇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당신은. 와타루는 지느러미 끝으로 그 손가락을 올려쳤다. 에이치는 물이 뚝, 뚝, 떨어지는 손가락으로 셔츠의 앞섬을 풀며 고개를 숙였다. 고요히 입을 맞추고, 젖은 손으로 몸을 적시고. 당신은 파도처럼 내게 밀려든다. 떨어진 입술에서는 습기어린 숨이, 그리고 조금 짠기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네가 바란다면, 와타루."
왜일까. 목을 두꺼운 쇠사슬로 조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Amazing. 딱 그 말이 어울렸다. 지난 며칠 간 영화를 보기위한 용도로 제작된 방에서-육지의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사소한 이유로 방을 만드나요? 라는 질문에 에이치는 담담히 대답했다. 누군가는 그런 사소한 이유로 건물을 짓기도 하지.- 여러 영화를 함께 섭렵하는 동안 배운 단어 중 하나였다. 뚝딱거리는 소리가 나 불편할 거라더니, 이런 걸 만들었구나. 와타루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연못이라는 게 이런 모습일까 상상해보았다. 그러나 연못은 이렇게 정확한 사각형의 형태를 띄고있지는 않을 것이며, 그가 살던 바다와 똑같은 염분과 적당한 세기의 간접조명이 갖추어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텐쇼인 에이치의 저택에 새로 들여온 수조-말이 수조였지, 넓직한 수영장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는 와타루가 평생이고 살기에 전혀 무리가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에이치는 아쉽단 듯 말했다. "새 별장은 몇 달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그때까지만 여기 있어줘."
"새 별장이라고요? 이걸로 충분해요. 여기서 더 뭘 만드려고 그러시나요? 작은 바다?"
"그 정도는 해야 소중히 키운다고 말할 수 있겠지. 부담스럽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난 와타루에게 넘치도록 주고 싶은걸. 뭐든 받아줬으면 좋겠어."
당신에게는 이게 넘치도록 준다는 행위인걸까. 넓은 수조는 꼬리 지느러미를 답답하게 매어놓지 않았다. 수면을 따라 넘실거리는 옅은 난색등의 빛과, 아름답게 조성된 수조는 분명 기뻤지만, 와타루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젖은 손을 내밀고, 자연스레 맞잡아주는 당신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그러면 그제서야 아, 하고, 무언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런 걸 찾아 떠나왔다. 작은 바다 따위를 바랐다면, 나는 그 심해에서 영원토록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얼음이 우는 소리를, 당신의 심술을, 당신이 만들어낸 얼어붙은 파도를 사랑해서-.. 봄이면 따스해질 바다를 두고, 오직 당신이라는 파란(波瀾) 속에서 영원토록 잠겨죽고 싶다고 생각하여, 이곳에 온 것이다. 당신은 그걸 알아야 했다. 당신이 나라는 존재를 한없이 탐하듯, 나는 당신의 순애를 한없이 갈망한다.
꼭 우리는 밑 빠진 독같군요. 그래도 우리는 고집이 강한 사람들이니까요. 결코 서로를 채우는 걸 포기하지 않을 거에요. 신화 속 언덕에 돌을 굴리던 시시포스와 같이, 죽음이 끝을 선고할때까지 사랑을 채워넣읍시다.
와타루는 말로 묻지 않았다. 따라서 대답도 없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공간을 메우는 숨소리만으로도 그가 긍정함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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