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쌍둥이/쵸로오소

비오는 날이면.

LIEE_ 2020. 4. 25. 01:19

 

 

 

1. 왜?

 

문득 뒤를 돌아보며 묻는 오소마츠에 쵸로마츠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리숙한 얼굴에는 궁금증이 한가득 담겨있다. 어깨너머 하늘은 우중충한 낯색을 하곤 투명한 빗방울만 땅바닥에 쏟아내고 있다. 바닥에 빗방울이 부딫히고 조각나고, 물줄기가 되어 흐르는 소리가 침묵을 메운다.

 

방금 불렀잖아.

안 불렀는데?

에, 그랬어?

 

잘못 들었나 봐. 도로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금 허공을 가르는 빗방울들을 바라본다. 흔들흔들, 창문에 걸터앉은 발을 굴러보다가 발끝을 오므리며 까르르 웃는다. 퍽 재미있다는 모양새였다. 쵸로마츠는 그 뒷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손 안의만화책에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만화책 속에, 짙은 명암으로 표현된 주인공은 열세인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뭐?

..뭐가?

방금 불렀잖아, 오소마츠. 하고.

 

이상함을 느낀 것은 그때부터다. 장난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얼굴로, 왜냐는 물음을 던지는 오소마츠에 쵸로마츠는 할 말을 잃고 머뭇거렸다. 너가 잘못 들은거야, 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하다. 두 번이나 잘 못 들을 리가 없잖아, 라는 대답이 돌아올 게 뻔하다. 평소 짓궂은 장난을 많이 친 자신이니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어쩌지, 하고 고민하는 쵸로마츠를 보던 오소마츠가 다시금,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뒤쪽을 바라봤다.

 

왜 그래 오소마츠. 가만보던 토도마츠가 묻자 오소마츠가 조금 희어진 안색으로 이쪽을 돌아봤다. 표정이 제법 겁에 질려있었던 지라, 어리던 쵸로마츠 또한 약간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오소마츠를 재촉했다. 왜 그러는데. 오소마츠는 조그맣게, 주의깊게 듣지 않으면 빗소리에 묻힐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가 날 불러, 계속.

 

그건 장난이 아니었다.

 

 

 

2. 오소마츠는 비가 오는 날이면 환청을 듣는다.

 

마츠노 가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마츠노 오소마츠는 비가 오는 날이면 환청을 들었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살피는 오소마츠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오소마츠는 방황하는 아이처럼 주변을 살폈다. 그것은 거의 고질병이었다. 어릴 적, 오소마츠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비가 오는 날이면 하루도 빼놓지 않고 환청을 들었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그렇게 놀라?

아? 딱히, 별 거 아냐.

 

쵸로마츠가 인상을 찌뿌리고 물으면, 오소마츠는 그저 살살 고개를 저으며 녹아들듯 자연스레 웃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 듯. 하지만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다른 형제들은 알지 못하지만, 특이하게 쵸로마츠만 느끼는 것이었지만, 오소마츠의 표정에서 드러났다. 뒤를 돌아보고, 주변을 살피는 오소마츠의 표정에는 미세한 무언가가 섞여있었다. 두려움? 공포? 방황하던 쵸로마츠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그것은 패닉이었다.

 

 

 

3.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토도마츠가 물었다. 이번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난 오소마츠 탓이었다. 짧막한 비명에 쥬시마츠를 제외한 육둥이 전부가 잠에서 깼다. 밖에서는 추적추적, 빗소리가 들려온다. 글쎄, 기억은 안 나는데 뭔가 어마어마한 꿈을 꾼 것 같네. 한탕한 꿈이려나. 척 봐도 거짓말이다. 그 비명은 환호의 비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도 자세히 묻고 싶어하진 않는다. 이 밤중에 잠을 설쳐가면서까지 명확한 설명을 요구할 이는 없다. 아, 그래. 토도마츠는 켰던 불을 도로 끄고는 자리에 누웠다. 쵸로마츠는 오소마츠 쪽으로 몸을 붙이고는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들려오는 숨소리는 고르지 않다. 진정하려는 듯, 크고 작게 쉼호흡을 하고는 있으나 잦아들지 못하는 숨소리였다. 쵸로마츠는 정자세로 바르게 하고있던 몸을 조금 비튼다. 잠꼬대를 가장해 팔을 오소마츠의 몸 위로 뻗고는 가만히 그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면, 그제서야 오소마츠의 숨소리는 조금씩 잦아들어 규칙적으로 변해갔다. 비오는 날, 쵸로마츠의 밤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다음날 쵸로마츠의 눈가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자리해 있다. 잠을 설친 건 오소마츠형인데, 왜 죽어가는 몰골은 쵸로마츠가 하고있어? 이치마츠의 물음에 답하기도 귀찮단 듯 손을 내저은 쵸로마츠가 탁자 위로 그대로 엎어졌다. 제 밤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4. 오소마츠가 가장 괴로운 시기는 역시나, 한여름이다. 물론 그가 더위를 심히 잘 타는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심한 것은 비. 바로 장마시즌이다. 짧으면 하루, 길면 4일 내내 비가 내린다. 오소마츠는 장마가 오면 아예 하루종일 누워서 잠만 잤다. 저녁밥만 몇 술 뜨고 곧장 자리를 펴고 누워 잠만 하루 내리 자고는 했다. 간혹 2층에 올라갈 일이 있어 보면, 그도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잠을 자면서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무의식 중에서도 귀를 막고는 뭐라 중얼대기 일쑤다. 쵸로마츠는 살짝 땀에 절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장마가 온 지 어느새 이틀이다. 오늘은 목욕탕에 끌어가든 업어가든 해서라도 데려가리라 다짐한다.

 

 

에-, 형아 목욕 안 해도 괜찮은데. 딱히 한 것도 없고.

여름이잖아, 눅눅하고 땀도 나고. 땀냄새 난다고.

왁, 역시 드라이몬스터!

 

이건 드라이몬스터랑 상관없이, 정확히 팩트니까! 단호하게 소리친 토도마츠가 목욕바구니를 내밀면, 귀찮다는 듯 그것을 건네받은 오소마츠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다. 그러면서도 흠칫, 떨리는 몸이 주위를 살피진 않았어도 그의 귀 주변이 여전히 시끄럽단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쵸로마츠는 들고있던 목욕바구니를 한 손에 꼭 쥐고, 오소마츠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비척비척, 오소마츠의 몸이 맥없이 끌려온다.

 

제대로 걸어, 넘어져.

네네 쵸로엄마.

누가 네 놈 엄마냐!

 

갈수록 느려지는 발걸음에 잡고있던 소매를 놓고 다른 형제들을 따라 걸었다. 걷다가 뒤쳐지면 알아서 속도를 높이겠지. 쵸로마츠는 마음 한 켠에서 스멀거리던 걱정을 떨치고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찰박, 찰박, 물웅덩이가 밟히는 소리가 뒤쪽에서 안심하란 듯 들려온다. 브라더들, 너무 늦다고? 뒤를 돌아보며 들고있던 우산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려보이는 카라마츠에 쵸로마츠가 우비를 조금 더 눌러쓰고 대답했다. 응, 금방 가니까. 그제서야 감았던 눈을 뜬 카라마츠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진다.

 

하? 왜 그래, 카라-..

오소마츠-!!!

 

섬찟, 카라마츠의 외침에서 심상치않음을 느낀 쵸로마츠가 뒤를 돌아보았다. 멍하니 골목 안을 바라보고 있는 오소마츠의 뒤로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오고 있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그것은 아슬아슬하게 오소마츠의 앞에 멈춰선다. 바로 옆에서 매연 냄새가 나자 겨우 알아차린 듯 오소마츠는 한 발자국 물러서 사과의 말을 건넸다. 모자가 벗겨지는 걸 아는 지 모르는지, 급하게 뛰쳐간 쵸로마츠가 오소마츠의 팔을 잡아 끌어안으며 함께 사과했다. 눈매가 사나운 배달원은 다시 엑셀을 밟으며 거리를 지나쳐갔다. 쵸로마츠의 눈매가 사나워진다.

 

미쳤어?! 거기 왜 그러고 서 있어!

..잠깐 넋을 놓았네. 미안.

시발, 그게 뭔데 대체?

 

뭐가? 쵸로마츠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앎에도 구태여 묻는 오소마츠에 쵸로마츠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 물어보면 대답 못 할 줄 알고? 지금껏 그랬던 것마냥, 이번에도 내가 넘어가주길 바란단 말이지. 이런 짓을 해놓고도. 어림도 없다. 쵸로마츠는 단숨에 숨을 들이키고 말했다.

 

별 거 아냐 라고 말하면 죽여버릴거야. 그거. 그 환청, 대체 뭔데?

..진짜 별 거 아닌데.

지금 나랑 장난 해? 당장 안 불어?

 

오소마츠의 눈이 난처한 빛을 띈다. 쵸로마츠가 그의 멱살을 틀어잡으려 팔을 올릴 때, 쥬시마츠가 냉큼 달려와 오소마츠의 목을 끌어안으며 달려들었다. 형아, 다쳤어?! 평소의 활기참보다는 걱정이 담긴 외침에 오소마츠가 웃으며 쥬시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정색을 하며 달려들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래이다. 쵸로마츠는 차마 밝아지기 시작한 그것을 망치지 못하고, 그저 주먹만 말아쥐었다.

 

 

5. 오소마츠의 멍한 눈이 창밖을 응시했다. 이번 장마는 미치도록 길다. 지난 4일간 이불에 파묻혀살던 오소마츠는 잠으로 시간을 떼우는 것에 한계가 왔는지 아침부터 계속 빗줄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평소 질리도록 달고 살던 만화책은 떠들더도 안 본다. 쵸로마츠는 방 안을 살폈다. 퀭한 눈으로 창밖을 보는 오소마츠와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카라마츠는 토도마츠와 오랜만에 외출을, 쥬시마츠 또한 몸이 근질거리는지 이치마츠를 끌고 고양이카페로 나갔다. 고로 집 안에 있는 것은 단 둘이다. 저와 오소마츠. 단 둘이다. 쵸로마츠는 구인잡지를 내려놓고 오소마츠 쪽으로 다가갔다. 창문 너머로 반사되는 자신이 보일 텐데도 아무 말이 없다.

 

형.

...

오소마츠형.

..왜?

 

쵸로마츠는 슬슬 결착을 내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인생이 있어 이런 순간이 몇이나 올까. 모두 모여 8명인 대가족 중 자신과 오소마츠만이 집에 남는, 비오는 점심이 인생에 몇이나 있을까. 쵸로마츠는 제 쪽을 슬그머니 돌아보는 오소마츠와 눈을 마주쳤다. 언제부터,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제대로 아는 이는 오소마츠 하나 뿐일 것이다. 지쳐서, 반쯤 내려간 눈꺼풀을 하고는 저를 바라보는 오소마츠에게 쵸로마츠가 말했다.

 

그 환청에 대한 거, 슬슬 다 털어 놔.

쵸로마츠, 형아 피곤하다.

알아, 그러니까 말해.

그냥 좀 넘어가면 안 되냐?

지난 몇 년은 넘어가준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해?

 

오소마츠는 입을 다물었다. 쵸로마츠의 말 중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오히려 거짓이라 한다면 자신이 더 많이 말하고 있다. 오소마츠는 쵸로마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올곧게 자신을 응시하는 눈이다. 오소마츠는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환청에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히 쵸로마츠는 포기할 기색이 없다. 5일간 너무도 시달렸다. 끈질기게 진실을 요구하는 쵸로마츠를 웃으며 떨궈낼 자신도, 힘도, 확신도 없다. 오소마츠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말과 같았다. 오소마츠는 고개만 돌려 쵸로마츠를 보던 것을 그만두고, 몸을 돌려 마주보았다.

 

말해줄 거야?

...뭘 말해줘야 하지?

환청. 지금 들리는 환청부터.

 

오소마츠는 그 말에 귀에서부터 전해오는 감각에 집중했다. 이것은 몇 년 가량 제 귀속을 떠나지 않던 목소리. 비오는 날이면 제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던 목소리. 그 날, 그 날 이후로 저를 괴롭혀오던 목소리. 다시 들었다. 비웃음에 가득 찬 목소리가 속삭인다. -넌 벗어날 수 없어. 네가 내게 벗어나서 뭘 할 수가 있지? 넌 이미 공범이야, 오소마츠군. 오소마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것을 그만두었다. 집중하던 것을 그만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파고든다.

 

-나는 3명의 사람과, 15마리의 고양이와-,

오소마츠형?

-개구리 3마리, 100마리의 소금쟁이를 죽였다.

오소마츠.

제발, 닥쳐.

 

귀를 틀어싸맨 오소마츠가 속삭이듯 애원했다. 귀 속을 파고들어온다. 그 날의 악몽이다. 말할 수 없던 악몽이다. 지금은 지나가버린 옛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눈물을 흘릴 때면 엄습해오던 악마다. 악마다. 그 날의 악몽이고, 그 날의 악마다. 모아 감싼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어온다.

 

-보아하니, 너도 살고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듣고싶지 않아, 그만 좀 해. 언제까지 괴롭힐 작정이야. 작작하라고. 얼마나 더 내 안에 남아있을 셈이야. 난 이제 널 떠올리고 싶지 않아. 넌 지났다고. 넌 지났다고. 넌 죽었다고. 내 안에서 죽어야 마땅한 인간이라고.

 

하지 마, 그만. 오소마츠 그만! 그만 해, 안 돼.

 

쵸로마츠가 기겁을 하며 오소마츠의 귀로부터 손가락을 뜯어냈다. 손톱에 피가 물들어있다. 아득바득 파고들어있던 손톱이 쵸로마츠의 손에 억지로 우악스럽게 떨어져나갔다. 얼마 되지 않아 도로 귀를 막으러 향하는 손에 쵸로마츠가 서둘러 제 손을 가져다댔다. 오소마츠가 귀에 닿아오는 이질적인 감촉에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누구지? 누구지? 나인가? 누구지? 귀를 감싼 손으로부터 익숙한 향이 밀려온다. 비누향, 섬유유연제의 향. 결벽증의 인간한테서나 느낄 수 있는 청결한 향. 아, 쵸로마츠구나.

 

미쳤어? 왜 그래. 왜. 괜찮아?

..아, 응. 괜찮아.

괜찮긴. 좀 진정해. 얼굴에 상처났잖아. 안 아파?

 

얼굴에 난 물리적 상처 따위야 제 알 바가 아니다. 다시금 제 귀를 맴도는 목소리에 오소마츠는 눈 앞의 품에 파고들었다. 당황한 듯 쵸로마츠가 외친다. 징그럽게, 왜 이래 진짜.. 많이 힘들어? 그제서야 오소마츠는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가, 눈을 감았다가 하며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했다. 버릇과도 같던 부정이 아닌 진실만을 고한다.

 

..힘들어. 안 괜찮으니까 좀 안아줘.

 

저를 감싸오는 손길이 한층 더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며, 오소마츠가 초록색 파카 위로 얼굴을 묻었다.

 

 

6. 그, 기억해? 그 사람 있잖아. 우리 집에 하숙하러 왔던 남자.

누구?

..토고아저씨라고, 기억 안 나?

 

그제서야 쵸로마츠는 기억의 조각 중 한 남자를 찾아낸다. 비정상적으로 착하던 그 남자를. 눈이 옆으로 길게 찢어진, 체크무늬 정장을 입던 그 남자를 떠올린다. 그 남자. 상냥한 가면 아래 소름끼치도록 어두운 얼굴을 하던 그 남자를 떠올린다. 오소마츠의 목을 잡고 위협하던, 달아나던 그 남자. 쵸로마츠는 눈을 잠시 감는다. 지난 날의 악몽에 시달리던 오소마츠가 아른거린다.

 

쵸로마츠, 자꾸 나타나.

 

그 시절 오소마츠는 거짓말을 몰랐다. 쵸로마츠 또한 자연스레 남을 위로할 줄 알았다. 쵸로마츠는 두려움에 떠는 오소마츠를 안고 달랬다. 괜찮아 오소마츠. 그 남자 감옥간댔잖아. 괜찮아. 오소마츠는 언뜻 잠잠해진 듯 보였다.

 

 

7. 오소마츠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그가 감옥에 갔다고, 제 인생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확신한 지 몇 달 만이었다. 비가 누덕누덕 내리는 날, 그는 분노에 찬 얼굴을 우산으로 가리곤 오소마츠의 가슴팍에 시퍼런 칼을 들이밀며 읖조렸다. 멍청한 꼬마 같으니, 내 너 때문에 감옥에서 몇 달을 썩었는 줄 알아? 오소마츠는 우비에 맺혀있던 빗방울이 제 얼굴에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고개를 저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토고가 속삭였었다. 누구를? 오소마츠는 비인지 눈물인지가 모를 것이 흐르는 얼굴로 대답했다.

 

저를요.

너만?

제 친구들이랑, 엄마아빠도요. 형제들도요.

그럼 넌 나에게 뭘 해주지?

아저씨가 하란 걸 할게요. 제발요. 살려주세요.

 

그렇게 토고와 오소마츠의 비밀놀이는 다시 시작됬다. 토고는 더이상 오소마츠를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강도라는 특이한 조합은 눈에 너무 쉽게 띈다. 토고는 결코 멍청하지 않았다. 그는 정도를 알았다. 그는 그 대신, 오소마츠를 써먹을 다른 용도를 찾았다. 그는 일상 속에서 저를 괴롭히는 분노를,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스트레스를 오소마츠에게 풀었다. 낡은 공터의 토관 안에 가둬두고 이리 때리고 저리 떄리고, 발로 차고 목을 조르고, 돌맹이를 던지고 그 몸을 던지고. 욕하고 겁주고. 오소마츠는 경찰들이 그를 다시 체포할 때까지 그 폭력에 시달렸다. 경찰은 토고가 오소마츠를 다시 찾아 폭행한 줄 몰랐다. 그 시절의 어린 오소마츠 또한 제가 폭력을 당했노라 말할 여력이 안 됬다. 몇 달 동안의 비밀놀이는 그렇게 완전히 막을 내렸다. 마지막 흔적을 그에게 남기고.

 

오소마츠는 제 눈으로 토고가 체포되는 것을 보았다. 그 날도, 비오는 날이었다. 토고와 오소마츠가 재회한 그 날처럼 비가 오는 날이었다. 토고는 찢어진 눈알을 데구륵 굴려 눈동자를 제쪽으로 한 채 소리없이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비오는 날, 다시 놀아주마.

 

오소마츠의 환청은 그 날부터 시작됬다. 비오는 날의 환청은 그 날부로 시작했다.

 

 

8. 왜 말 안 했어.

..못 하겠었어.

 

아마 이토록 지치지 않았더라면 오늘도 말하지 못했으리라. 귓가에서 속삭인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네가 감히 말해? 널 죽이고 네 가족을 죽일테다. 살벌한 말들이 쏟아져온다. 오소마츠는 파카 위로 얼굴을 부볐다. 쵸로마츠가 제 옷 위로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푸석푸석하게 가라앉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겨든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오소마츠는 잠시 침묵했다. 그건 그가 묻고싶은 말이었다. 너는 날 위해 뭘 해줄 수 있을까. 나는 너에게 도움받을 수 있을까. 나는 너로 인해 편해질 수 있을까, 비오는 날에도. 오소마츠는 곰곰히 생각했다. 오소마츠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계속 얘기해줘. 계속 말해 그냥.

그거면 돼?

네 목소리로 그 놈 목소리가 가려졌으면 좋겠어.

 

쵸로마츠는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오소마츠가 원한 것은 그저 자신의 목소리이였지만 어떻게 그것을 줘야할 지 모르는 것 같았다. 쵸로마츠는 제 품을 파고든 오소마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숙여 그의 귓가에 가까이 갔다. 빗소리가 흐르는 방 위로 쵸로마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에-..

 

오소마츠는 눈을 감았다. 사납게 일렁이던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져갔다. 바로 옆에서, 쵸로마츠의 목소리가 잔잔히 스며든다. 빗소리도, 그놈의 목소리도 없다. 그 날의 악마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9. 오소마츠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회색빛인 것이 딱 보아도 오늘 안에 비가 올 것이 분명했다. 라이브를 즐긴다며 집을 나선 쵸로마츠도 지금쯤 같은 하늘을 보고 있을테다. 그래도 뭐, 이제는 나름 괜찮으려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할 지언정 그 날의 악마는, 악몽은 더 이상 직접적으로 오소마츠를 괴롭히지 못했다. 쵸로마츠를 옆에 두고 있는 한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속삭임이 그것을 대신했다. 오소마츠는 예전의 자신보다 훨씬 태평해진 얼굴로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회색빛 거리 위로 검은 물방울이 하나 둘 내려앉기 시작한다. 익숙하게, 가만히 귀를 틀어막으며 질리는 기분으로 거리를 내려다본다. 우산 하나가 움직인다. 하얀 선과 평행하며, 뚜벅뚜벅 넓은 보폭을 하고 걸어간다. 집 앞을 지나치다가, 문득 멈춰서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돈다. 왜? 오소마츠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우산의 각도가 서서히 들어진다. 오소마츠는 곧 눈동자에 들어찬 궁금중을 두려움으로 바꿔냈다.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다. 악몽 속에서 보던, 그려보라 하더라도 순식간에 그려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얼굴. 눈이 길게 찢어진 그 남자의 입이 휘어진다.

 

아, 그 날의 악마가 돌아왔구나. 오소마츠는 바짝 얼어 마주친 눈을 피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굳었다.

 

 

10. 오소마츠는 이끌리듯 밖으로 향했다. 몇 번이고 미끄러지는 손으로 우산을 집어들었다. 그럴 리 없다. 내가 본 것이 사실일 리가 없다. 그것은 현실이 아님이 분명하다. 분명, 분명히 그럴 것이다. 오소마츠는 비오는 날, 제 발로 밖을 향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회색빛 거리 위로 붉은 오소마츠가 뛰쳐나왔다. 방금 보았던 우산은 없다. 노란 체크무늬 우산,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없이 밝은 노란색 체크무늬 우산. 오소마츠는 이리저리 돌려가며 찾았지만, 그것은 없었다. 빗줄기가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만 가득하다. 회색 도로에 색이라곤 제 파카의 붉은빛뿐이다.

 

아, 환상이었을까. 그것은 환상이었나. 오소마츠는 질린 듯 도로를 타고흐르는 빗물들을 바라보았다. 작은 샘을 이뤄 흐르는 그것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환청이 사라지니 환상인 것인가. 그 남자가, 나에게 무어라고 이토록 오래간 내게 머문단 말인가. 오소마츠는 우산을 꾸욱 다잡았다. 이 와중에도 -오소마츠군, 오소마츠군 하며 제 귀에서 시끄럽게 목소리가 윙윙댄다. 쵸로마츠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이불에 처박혀 잠이나 자야할 듯 싶었다. 오소마츠는 집 대문을 향했다.

 

오소마츠군, 집에 들어갈 생각이야?

 

아, 질리네 진짜. 오소마츠는 뒤에 아무것도 없을 것을 예상하고도 습관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란색, 체크무늬에, 길게 찢어진 눈, 두 개가, 그곳에.

 

아-, 이제야 여길 보는군. 귀가 먹었나 싶었다.

..토고.

 

오소마츠의 안색이 희게 질린다. 토고의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11. 거짓말이지, 그 놈이 비오는 날 어디 나갔을 리가 없잖아. 쵸로마츠가 소리쳤다. 굳게 짓누르는 초조함에 오도가도 못하는 침묵이 깔린 거실에 대고. 빗줄기가 창문천장할 것 없이 소란스럽게 두드려댄다. 고요히 어둠이 내리깔린 바깥하늘에 쵸로마츠가 초조히 거실을 맴돌았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쵸로마츠의 발자국소리가 거실에 내리깔린다. 점심, 비가 올 때부터 아는 지인에게 라이브 티켓을 양도해버리고 곧장 집으로 돌아온 쵸로마츠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오소마츠만을 기다렸다.

 

쵸로마츠는 비오는 점심, 식탁 옆에 앉아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생각했다. 그 놈이 혼자 어딜 갔겠어, 분명 다른 녀석들이랑 있겠지. 허나 그 시점부터 쵸로마츠의 인내심은 한계였다. 비오는 날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로 환청을 피하는 오소마츠라니.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이었던지라, 쵸로마츠는 짜증이 날 대로 나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른 형제들이 다 돌아온 현재에 이르러서도 오소마츠가 집에 없자, 쵸로마츠는 폭발했다. 그리고 지금 이 정적이 그 결과다. 모두가 숨죽인채 쵸로마츠의 격정을 피했다. 눈 하나라도 마주칠 새라 바쁘게 눈알을 굴렸다.

 

쵸로마츠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욕짓거리를 씹어삼키곤 복도로 나섰다. 제가 거실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뒤에서부터 한시름 놓았단 듯 한숨소리들이 터져나왔다. 다 들리거든, 하고 소리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놓고서 또 분위기를 망친단 건 안 될 짓이니까. 쵸로마츠는 마른 세수를 하며 길게 숨을 토해냈다. 살갗에 닿아오는 공기가 눅눅하다. 아마 오늘 밤이 되도록 비가 내려댈 터였다. 어디서, 뭘 하고, 누구와, 왜 있는지. 왜 내 곁이 아닌, 다른 곳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쵸로마츠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얼굴에서 손바닥을 떼내었다. 왜 내 곁이 아니냐니, 꼭 누가 들으면 떠난 전 애인에게 하는 말이라고 오해할 법한 말이었다. 내가 드디어 미쳤구나. 쵸로마츠는 뒷덜미를 쓸어넘기며 계단을 밟았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 그러고보니 아빠 올 시간이 다 되었나. 아빠한테도 오소마츠형이 나갔다고 말해줘야 한다.

 

어서 와 아빠, 오소마츠 형이...

에, 형아인데.

...하?!

 

쵸로마츠의 동공이 확장되고, 오소마츠가 익숙한 웃음을 띄어보인다. 그의 손에는 빗물이 뚜욱뚜욱 떨어지는, 투명한 비닐 우산 하나만이 쥐여져있다.

 

 

12. 쵸로마츠가 의심어린 눈으로 오소마츠를 쏘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소마츠는 카드 몇 장을 손에 쥔 채 무슨 카드를 내야할 지 전력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의외로 쥬시마츠와의 트럼프가 꽤 고전인 듯 싶었다.

 

밤이 다 되어서야 집에 기어들어온 오소마츠의 말로는, 오늘 하루 그의 행적은 이러했다. 비오기 전 치비타네에 갔던 망할 장남은 비가 온 것을 보고 그대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다가, 밤이 되도 비가 그칠 기미가 안 보이자 우산 하나를 빌려 귀가했단 것이다. 언뜻 보면 그럴싸했으나, 쵸로마츠의 귀에는 한없이 허술한 변명 투성이였다. 오늘 아침부터 하늘은 회색빛이었다. 비라면 기겁을 하는 장남이 겁도 없이 그 하늘을 보고도 밖에 나갈 생각을 했을 리가 없다. 쵸로마츠가 입을 열어 조금 더 추궁하려던 참이었다. 집 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은 오소마츠 덕에 기가 살았는지, 토도마츠가 시선을 휴대폰에 고정한 채 말했다.

 

그보다, 너무 참견 심하지 않아? 이제 우리 성인이라고? 집에 좀 늦게 들어올 수도 있는거고.

하?

에, 진지하게 말해야 할 건 아니지 않음~?

아니, 진지하게 말해야되는 거지! 방금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데!!

 

특히 쵸로마츠형, 유독 오소마츠형 일에만 유난떠는 거 알지? 쵸로마츠의 눈썹이 한 차례 올라갔다 내려왔다. 분위기를 진작에 알아차린 쥬시마츠가 카드를 내려놓고 이치마츠의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간다. 카라마츠 또한 들고있던 패션잡지를 내려놓고 몸에 긴장을 더한다. 오소마츠가 싸늘한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쵸로마츠가 선수를 친다.

 

지금 내가, 유난을 떨어? 토도마츠 너 미쳤냐?

에, 응?

가만뒀더니 못 할 말이 없어. 넌 이 새끼 걱정 안 됬어? 비가 좆같이 쏟아지는데 밤늦게 안 들어오잖아. 걱정이 안되냐고 이게.

그게.. 아니, 오소마츠형이 무슨 얘는 아니잖아..

그래서, 걱정할 거리가 아니었냐고 이게. 묻잖아.

 

카라마츠의 눈이 오소마츠를 향한다. 말려달라고, 이 상황을 타파해 달라는 무언의 신호. 말싸움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폭력에 가까웠다. 쵸로마츠가 몰아붙이고, 토도마츠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방금의 분노가 향할 곳을 찾았단 듯 싸늘하게 몰아친다. 토도마츠의 목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아, 말려야겠네. 귀찮단 듯 머리를 쓸어넘긴 오소마츠가 일어섰다.

 

자- 그만그만, 너무..

넌.

응?

넌 사람이 걱정할 줄도 모르고 거기서 히히덕거리다 왔어? 시발 아주 나 엿먹으라고 하는 거지, 아냐?

 

아, 가슴이 미워진다. 오소마츠는 힘겹게 입가의 웃음을 유지했다. 걱정할 줄 몰랐냐고? 히히덕거리다 왔느냐고?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다. 제게 구원을 바라듯 올려다보는 토도마츠의 얼굴에 겨우 입을 뗀 오소마츠가 말했다.

 

아, 나한테 화난 거였음? 왜 괜한 톳티한테 화풀이를 하고 그래~, 우리 막내 죽겠네.

넌, 시발..!!

 

쵸로마츠의 손이 주먹을 쥔 채 허공을 가른다. 그것도 잠시다. 얌전히 감긴 오소마츠의 두 눈을 본 쵸로마츠가 든 주먹을 그 자리에서 가만히 들고있다가, 힘이 풀렸단 듯 추욱 떨어트렸다. 제게 꽂혀드는 고통이 없자 의문이란 듯 오소마츠의 눈이 떠진다. 비가 와서 그래, 비가 와서. 쵸로마츠는 여전히 제 모습을 유지중인 주먹을 한 층 더 굳게 쥐며 거실을 박차고나왔다. 2층 방으로 터벅터벅 향해, 소파 위로 쓰러지듯 눕는다. 이래저래 피곤한 밤이다.

 

 

13. 내 가슴이 왜 미워지는지 넌 모른다. 내가 오늘만큼은 널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넌 모른다. 오소마츠는 목욕탕에 가는 형제들을 따라나서지 않았다. 다른 형제들도 비오는 날만큼 오소마츠에게 외출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소마츠는 거울 앞에 선다. 몸 위로 시퍼렇게 멍자국이 남아있다. 아, 이걸 어떻게 감추지. 벌써부터 막막하다. 비가 멎으면, 그때는 다같이 목욕탕을 가지않고서야 의심을 피할 수 없을텐데. 오소마츠는 욱씬거리는 배를 애써 무시하곤 제 파카를 집어들었다. 옅은 피비린내가 나지만, 그저 붉다. 붉기에 티가 나지 않는 것에 안도한다. 빨간색 의외로 꽤 편한 색이네-, 하고 실없이 생각하며, 세탁기에 밀어넣는다.

 

피멍 든 몸을 씻어낸다. 여기저기 방울져 굳어버린 피도 떨어뜨린다. 다시금 피가 몽글몽글 솟아오르며, 따가운 통증이 느껴져온다. 아무래도 오래갈 상처로 보였다. 이걸 어떻게 감춰야하지. 잠깐, 그보다 바디워시는 따가워서 어떡하지. 막힘없이 바디워시를 목욕타월 위로 뿌리던 오소마츠의 손가락이 굳는다. 이래저래 난감한 밤이다.

 

 

 

14. 늘상 포근하게만 느껴지던 이불이 오늘밤만큼은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아, 오소마츠는 몸을 약간 뒤척였다. 어째설까, 그의 귀를 찌르는 토고의 끊임없는 속삭임 때문일까. 저 밤하늘은 그저 고요한데,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는데도 어째서 오소마츠의 주변은 조용할 수 없는가. 오소마츠는 가만히 고개를 비틀었다. 어둠 속에서 꽤 유려한 모양새를 띈 옆모습이 보인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보아하니 진작에 잠에 들었다. 그럼에도, 저 입에서 나올 상냥한 속삭임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건, 어째서.

 

-네 놈의 귀를 꿰뚫어주마, 영원토록 조용할 수 있도록. 네 머리를 뚫어주마.

 

아, 그러면 조용해질까. 그럼 증오스런 당신의 목소리가 죽을까. 내 안에서 당신이 죽을 수 있을까. 울긋불긋히 멍이 들었을 배가 아려오는 것만 같다. 내 머리가 부서져나가면, 그 안에 있는 당신이 죽을까.

 

-난 그 후에도 네놈 머리 꼭대기에서 군림할테다.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오소마츠는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토도마츠와 쵸로마츠, 나머지 형제들이 깨지않도록 얌전히. 이불을 가만히 펴두고 계단을 내려온다. 삐걱거리는 소음이 부모님의 방까지 새들지 않도록 조심하며. 거실 문을 열고 불을 킨다. 눈이 잠시 부시다가도 환한 방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서야 약간 마음이 놓인다. 소음없는 고요한 이 밤은 지옥이다. 내 머리 속을 맴도는 이 악마를 가릴 그 무엇도 없는 이 밤은, 분명한 지옥이다. 지옥이다. 탁자의 코타츠에 엎드려 손가락으로 귀 옆을 두드린다. 타다다닥, 타다다닥, 타다다닥, 안정적으로 소리가 퍼져나간다. 이러다가 잠들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럴텐데. 차갑게 식은 탁자 위에 턱을 괴고 창문 밖을 바라본다. 새벽이 찾아오려면 멀었단 듯, 어두컴컴하다. 조금씩 머리 속 의식을 갉아먹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진득하게 늘러붙어오는, 수마다.

 

 

15. 아, 죽을 것만 같다. 목을 졸라온다. 배를 걷어차온다. 아파요, 아파요, 아파요. 절절한 외침이 들려온다. 누구의 것이지? 누구의 것이지? 누구의 목소리지? 오소마츠는 눈물고인 눈으로 주위를 살피다가 그제서야 깨달았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제 입 뿐이다. 들리는 것도 제 목소리뿐. 애원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은 자신이다. 눈물이 볼을 타고흐른다. 흐려진 시야로 어둠에 감싸인 얼굴이 흐릿하게 보인다. 제 목을 쥔 우악스러운 손에서 십몇년 전의 향수가 느껴진다.

 

아, 당신. 그 날의 악마. 정말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런, 너무도 끔찍한 악마같으니.

 

오소마츠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귀 바로 옆에서 속삭여온다. 너를 죽일테다. 그 입을 닥치지 않으면, 널 죽여버릴테다. 널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맴돈다. 끝없이 맴돈다. 오소마츠에게는 이 뫼비우스의 띠를 짓누를 무언가가 필요했다. 상냥한 속삭임이, 따뜻한 손길이. 너무도 바라면 환상을 경험하게 된다고 누가 그랬던가, 오소마츠는 코끝에서 감도는 어렴풋한 비누향에 흐느낌을 억눌러 삼켰다. 목 뒤로 흐르지 못한 울음이 요동친다. 귓가에 이질적인 소음이 섞여든다.

 

 

16. -마츠, 오소마츠. 일어나. 오소마츠.

..쵸로마츠?

 

꿈 속의 그것은 환상이 아니던가. 오소마츠는 제 앞에 자리한 쵸로마츠의 얼굴을 보고는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물었다. 쵸로마츠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껴안은 오소마츠의 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있는 거야, 몽유병이라도 걸렸냐? 두꺼운 초록색 한텐의 소매가 눈물고인 제 눈꼬리를 훔치자, 오소마츠는 그제서야 눈 앞의 인영에 매달려안겼다. 귀를 파고들던 칼같던 목소리가 밀려난다.

 

뭐야, 왜 이래 징그럽게.

쵸로마츠, 아무거나 얘기 좀 해봐.

...비 안 와.

알아, 해 줘.

 

쵸로마츠는 잠시 침묵하다가, 제게 안긴 오소마츠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밀리지 않으려는 듯 버틴 채 얼굴을 숙인 오소마츠와 눈높이를 맞추려 고개를 내린다. 눈동자 두 쌍이 서로 마주친다. 오소마츠는 숨죽인 채 그것을 마주봤다. 새까만 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게 보였다. 지난 세월 간 하나같이 살아왔기에 알 수 있는 것들이. 의문이, 걱정이 보였다. 이유를 묻는 눈동자였다. 오소마츠는 그 눈을 회피하는 법을 알았다. 지난 몇 년간 침묵해왔듯, 답하지 않는 법을 알았다.

 

그냥, 나의 쵸로마츠 목소리나 듣고싶어서?

...분명 몇 달 전이라면 이 상황에서 욕이나 하고 넘어가긴 했을텐데 말이야.

에.

 

네 예상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거든. 빨리 다 털어놓는 게 좋을텐데. 오소마츠는 다시금 쵸로마츠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탄식했다. 아무리 제가 숨기는 것에 대가라지만, 왜 몰랐을까. 내가 널 들여다보는만큼 너도 날 들여다봤을 것을. 오소마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포기의 웃음이란 걸 쵸로마츠는 알았다.

 

 

17. 거짓말이지, 라고 말하고 싶어? 오소마츠의 물음에 쵸로마츠는 흠칫 몸을 떨었다. 제가 하고싶던 말이 오소마츠의 목소리를 통해 나온다. 분명 거짓말같은 이야기였다. 믿고싶지않았다. 쵸로마츠는 탁자에 엎드려 어디를 보는지 모를 초점없는 눈을 한 오소마츠를 조심스레 살피다가 말했다. 후드, 걷어봐. 쵸로마츠의 요구에 잠시 정신을 차린 오소마츠가 상체를 일으킨다. 추운데, 농담섞인 대답과 함께 망설임이 섞인 손길로 잠옷을 약간 들어올렸다. 시퍼렇게 물든 살결이 그림자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다.

 

..진짜, 거짓말이지.

푸핫, 그 말 할 줄 알았다니깐. 나도 잘 안 믿기는데-..

아니, 그거 말고. 지금 장난해?

 

왜 이딴 식으로 다치고도 말을 안 해. 덧붙여지는 쵸로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소마츠의 팔을 잡아끌은 쵸로마츠가 눈 앞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제꼈다. 저를 밀어내는 오소마츠의 저항은 신경쓸 바가 못 된다. 꿋꿋이 잠옷을 벗겨낸 쵸로마츠가 다채롭게 물든 오소마츠의 상체에 헛숨을 삼켰다. 물감으로 칠해놓은듯, 누군가가 마구잡이로 탁한 물감을 쏟아부은 듯 보라색, 푸른색으로 물들어 제 색을 잃고 있었다. 팔이니 어깨니 제 색을 유지한 곳이 어느 한 군데 없다. 그제서야 쵸로마츠는 제가 이제껏 굳게 잡고있던 팔을 놓았다. 제 손바닥 모양대로 하얗게 물든 팔이 다시 파랗게 물든다.

 

...

다른 녀석들한테, 말할 거야?

 

쵸로마츠는 고개를 들어 오소마츠의 두 눈을 마주했다. 두 눈 속에 담긴 것은 지난 수십년간 함께하지 않고서야 몰라볼 것들이. 걱정이, 초조함이 보인다. 쵸로마츠는 알았다. 오소마츠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쵸로마츠가 자신이 지금껏 힘겹게 지켜온 지금까지의 비밀을 탄로할까봐. 다른 형제들이 이 일을 알까봐.

 

그리고 쵸로마츠는, 이 비밀을 탄로하고 싶지도. 다른 형제들이 이 일을 알기도 원치 않았다. 쵸로마츠는 고개를 저었다.

 

 

18. 쵸로마츠는 가만히 창문 밖을 들여다보았다. 새벽에 일어나 악몽을 꾸기까지 한 오소마츠는 어지간히도 피곤했는지, 점심이 다 되도록 이불 속에 파묻혀일어날 줄을 몰랐다. 쵸로마츠는 가만히 도로 위, 고인 물웅덩이에 비친 맑은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간 밤, 자신은 어째서 고개를 저었는가. 어째서 이 비밀이 밝혀지길 원치 않았는가. 분명 진지해야 할 때를 아는 형제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오소마츠를 도울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렇게 도움을 받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온 몸이 멍든 오소마츠를 병원에 데려갈 수도 있을 터였고, 토고를 다시 감옥에 집어넣어 버리는 것도 쉬울 테였다. 그럼에도, 자신은 어째서 고개를 저었을까.

 

쵸로마츠는 심연 깊숙히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그림자로 가려진 입이 달싹인다.

 

독 점 하 고  싶 어 .

 

그것은 어두운 집착, 자신만이 이 비밀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오소마츠의 비밀이 자신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일종의 소유욕. 그래, 독점욕. 쵸로마츠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몸 속에 검은색 잉크가 떨어진 것만 같다. 검고 어둡게 물든다. 되돌이켜보면, 어제도 그러했다. 자신의 불쾌함은 이 독점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비 오는 날의 오소마츠를 독점하고 싶다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불쾌감. 나 이외의 누군가가 그 날같은 날, 그의 옆에 없었으면 좋겠다는 소유욕. 쵸로마츠는 흐려진 시야에 초점을 맞춘다. 노란색 체크무늬 우산이 보인다. 지나가는 행인인가, 아니면.

 

쵸로마츠의 머리속에 어린 날의 하숙인이 스쳐지나간다. 돌이켜보면, 그 사람도, 밝은 바탕의 체크무늬가 그려진 정장을 입고있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누구더라, 주인을 꼭 닮은 이름이었다. 강도, 강도, 강도, 강도, 그의 이름이 무엇이었지. 다시 흐려진 시야 속에서 우산이 기운다. 잠깐, 어째서 우산을. 지금 하늘은 청명하기 그지없는, 비구름 가신 하늘이건만. 우산 아래 얼굴이 보인다. 길게 찢어진 눈. 익숙치 않은, 하지만 그 얼굴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야비한 웃음. 그제서야 쵸로마츠의 머리속에 한마디 이름이 스친다. 토- 고-.(고토는 일본어로 강도.) 쵸로마츠는 눈꼬리만큼이나 찢어진 입꼬리를 보며 방을 나섰다. 재빨리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열어제낀다. 문 앞에는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안녕, 오소마츠군.

아-.

 

그래, 그 끔찍한 악마를 드디어 잡았구나. 쵸로마츠는 등 뒤의 목소리에 소리없이 웃었다.

 

 

19. 오소마츠는 하늘을 멍히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붉었다. 새벽부터 이제껏 꿈나라에 들어있다 온 탓이었다. 눈뜨고 일어나보니 검던 하늘은 빨갛게 변해있었다. 문득 슬며시 든, 몽롱한 정신으로 겨우 귀에 담았던 대화들이 떠오른다. 분명 토도마츠와 카라마츠의 목소리였다. 쵸로마츠형은? 그러고보니 아침부터 보이지 않는군. 아-, 이 형들은 차례로 사라지는 게 취미인가? 진짜 귀찮네. 잠결에는 그저 넘겼던 것이 이제서야 의식 속에 침투해온다. 오소마츠는 그때까지도 제 몸 위를 굳게 누르고 있던 이불을 그제서야 벗어나 몸을 일으켰다. 세상은 발간 빛이 스미고 있는데, 쵸로마츠는 집에 없었다. 쵸로마츠는? 거실로 내려간 오소마츠가 물었다. 쥬시마츠와 이치마츠가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박자와 방향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

몰라. 쭉 쥬시마츠랑 있었는데 아침부터 안 보였어.

야구하러 간 걸까?!

음, 그런가 보네. 찾으러 다녀올게.

 

저도 함께 가겠다며 왁왁대는 쥬시마츠를 이치마츠가 말린다. 오소마츠는 현관을 나선다. 복도를 서성이며 휴대폰을 하던 토도마츠가 다가와 물었다. 어디 가게? 오소마츠는 신발을 구겨신으며 대답했다. 밖에, 쵸로딸딸스키 찾으러. 토도마츠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의 눈에는 오소마츠가 꼭, 부모를 잃어 방황하는 아이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단 한 순간조차 놓칠 수 없던 옷자락을 꼭 쥐고 잠들었다가, 일어나보니 손 안의 그것이 사라져 울먹이는 눈으로 떠도는 아이. 쥐여져있던 것이 사라진 손을 움츠렸다 폈다를 반복하며, 끝없이 갈망한다.

 

밤에 비온대.

밤되기 전에 들어올거야.

그때까지 쵸로마츠형을 못 찾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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