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스타/와타에이

부탁해, 잔 다르크!

Liee 2025. 3. 21. 12:26

와타에이

220414

 

 

 

 

잔 다르크가 누구냐 하면-위인전에 나오는 그 위대한 여성이 아니라면-, 히비키 와타루가 어릴 적부터 키운 비둘기 중 하나였다. 개중에서도 유난히 가볍고 날갯짓이 힘찬지라, 비행을 아주 잘했다. 한때는 다리에 카메라를 달고 몇 시간씩이나 마시로 토모야의 스토킹을 하기도 했으니 그가 자신의 비행 능력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와타루가 제게만 유독 자주 부탁을 하는 것은 자신이 뛰어나다는 방증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는 언제나 그런 사소한 부탁들을 기꺼이 반겼다.

 

그날 역시, 잔 다르크는 제 가슴팍에 가방을 다는 손길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다리에 카메라를 달았을 때와 비교하면, 무게중심이 쏠리지도 않고 가벼워서 편했다.

 

“잔 다르크는 똑똑하니까, 여기가 어딘지 알 거예요.”

 

와타루가 가리킨 곳은 그가 종종 가던 커다란 흰색 건물이었다. 사람의 다리로는 한참이나 멀었지만, 잔 다르크에게는 눈 깜짝할 새 도착하는 거리였다.

 

“에이치를 기억하나요?”

 

와타루와 자주 같이 있는 사람이었다. ‘학교’ 앞에서 모이를 나눠준 적도 있었다.

 

“창문으로 보일 거예요. 창문을 두드리면 열어줄 테니, 꼭 이걸 전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와타루의 얼굴을 간절한 듯하면서도 애달픈 얼굴을 하고 있어서, 잔 다르크는 저절로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요즘 따라 안색이 어두운 제 친구가 이렇게나 간곡히 부탁을 하니, 꼭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 다르크는 곧장 날아올랐다. 가방 안에 뭐가 들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한 번 날갯짓을 할 때마다 날개 죽지에 걸리는 가방끈이 불편하긴 했지만, 프로인 잔 다르크에게 그 정도는 문제 축에도 못 끼었다.

 

깃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상냥하게 웃던 그 얼굴을 다시 본다 생각하니 신이 났다. 만나면 저번처럼 발 근처에 딱 붙어 몸을 기대야지. 길가의 비둘기에게 다정한 사람은 드물기에, 잔 다르크는 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도착하고도 착륙하지 못하고 건물을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다. 한눈에 알아볼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목적지인 에이치를 찾기가 어려웠다. 창틀에 가려져 구석만 빼꼼 보이는 연노란색 머리카락을 보고 겨우 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얼굴 위로 투명한 입마개를 쓰고 있었고, 옷도 일전의 것이 아니었다. 눈을 감아 내린 얼굴은 한 치 움직임도 없이 고요했다. 잔 다르크가 창틀에 앉아 보이지 않는 유리창을 부리로 두드려도 그는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죽었나? 잔 다르크는 불안한 마음에 총총거리며 창틀의 끝과 끝을 오갔다. 몇 번 얼굴만 본 인간이 죽는 것은 그렇다 쳐도, 제 친구가 상심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히 놓이지 않았다. 잔 다르크는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미세하게 열린 창문 쪽으로 다가가 그 사이로 고개를 드밀었다. 와타루의 집도 아닌 건물에 마음대로 잠입하는 것이 퍽 두려웠지만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건물 안에서는 독특한 향이 났다. 예전에 와타루가 자신을 간병해줄 때 나던 냄새였다. 얌전히 누워 수발 받던 그때가 그리웠지만, 냄새 자체는 좋지 않았다. 빨리 가방을 전해주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다행히, 머리맡까지 가서 구구 우니 그는 눈을 떴다.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살피기에, 잔 다르크는 몸을 힘껏 펴서 여 보란 듯 가슴을 내밀었다. 이 거추장스러운 가방을 빨리 치워줬으면 했다.

 

에이치는 우선 자신의 입마개를 벗겨냈다. 나도 입마개니 가방이니 하는 걸 직접 벗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잔 다르크는 그렇게 생각했다.

 

“와타루의 비둘기니? 귀여운 가방이네.”

 

귀엽다, 는 잔 다르크가 좋아하는 단어였다. 금세 아량이 넓어진 잔 다르크는 에이치가 힘없는 손길로 몸을 일으켜 제 가방의 지퍼를 열어보기까지의 긴긴 시간을 기다려주었다.

 

궁금했던 가방 안의 물건은 작은 쪽지였다. 활짝 펴 보니 손바닥 크기의 종이가 되었다. 에이치는 한참이나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미소 띤 얼굴로 속삭였다.

 

“잠시만 기다려줄래?”

 

고의로 그런다기보다는, 속삭이는 소리 외에는 낼 수 없는 것 같았다. 목소리에 섞여 나오는 쇳소리가 아프게 들렸다. 이미 아주 오래 기다렸다 싶었지만, 맡은 바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 싫었던 잔 다르크는 잠자코 시트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에이치가 옆의 서랍을 뒤져서 비슷한 크기의 종잇조각을 찾아내자, 그제야 잔 다르크는 일이 귀찮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그 위에 아주 작은 글씨로 무언가를 쓴 후, 사람 좋은 얼굴로 가방에 그것을 담아 지퍼를 꼭 잠가줄 쯤에는 이미 잔 다르크의 깃이 잔뜩 부푼 채였다.

 

“이걸 와타루에게 전해줘.”

 

이 거추장스러운 가방을 떼어낼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한 잔 다르크는 몇 번 세차게 울다가, 겨우 분을 가라앉히고 날아올랐다.

 

 

 


 

[에이치, 몸은 괜찮나요? 에이치가 자리를 비운 지 벌써 세 달째에요. 저도, 피네의 모두도, ES 여러분들도 걱정하고 있답니다. 답신이 어렵다면 제 메일을 확인만이라도 해주세요.

사랑을 담아,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오랜만이야, 시간이 벌써 그렇게 지난 줄은 미처 몰랐네. 절대 안정이라는 명목하에 외부와의 접촉은 일절 금지되고 있어서, 메일을 보는 건 어려울 것 같아. 그동안 세간의 반응이 되려 격해졌을까 걱정스럽네. 너희에게 책임을 떠넘긴 꼴이 된 것 같아 미안해. 몸 상태가 괜찮아지는 대로 돌아갈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줘.

상당히 건강해진 텐쇼인 에이치가.]

 


 

 

 

잔 다르크는 기분이 아주 떨떠름했다. 다녀온 사이 와타루가 외출을 한 탓에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몇 시간이나 그 가방을 메고 있어야 했던지라, 그가 돌아오면 한바탕 짜증을 내려고 했다. 와타루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긴장한 기색으로 제게 직진해 오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퍼덕이려고 들어 올렸던 날개를 슬그머니 내리고, 잔 다르크는 와타루가 가방을 확인할 수 있도록 얌전히 서 있었다.

 

와타루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쪽지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두꺼운 책을 촤르륵 넘겨보는 모습이 익숙했던 잔 다르크에게는 신기하기만 한 광경이었다.

 

“고마워요, 잔 다르크.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그가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니, 절로 깃이 부풀었다. 제 친구가 저렇게나 기뻐하는 걸 보면 아주 중요한 임무였던 게 분명했다. 여러 고난이 있었지만, 그 힘든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고 생각하니 발톱 끝까지 뿌듯함이 차올랐다. 그렇게 짜증이 나던 가방마저도 이제는 명예의 훈장처럼 보였다.

 

“앞으로도 가끔 부탁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잔 다르크는 수백 번이고 더 저 가방을 매고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메일을 확인하는 게 어렵다면 앞으로는 잔 다르크의 도움을 받도록 할게요.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도 있으니, 책임을 떠넘겼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보다, 그 정도는 맡겨주세요. 그마저도 미안하게 생각하시면 오히려 외롭거든요!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금지한다면, 병문안은 언제쯤 갈 수 있을까요? 보고 싶어요.

그리움을 담아,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나도 와타루가 보고 싶어. 병문안은, 아무래도 좀 걸릴 것 같아. 병문안이 가능할 정도의 몸 상태가 된다면 바로 퇴원할 생각이고.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의사 의견은 어떨지 잘 모르겠네. 한 번 물어봐 볼게.

이 비둘기 이름이 잔 다르크니? 간식 줘도 돼?

몸 상태가 좋아진 텐쇼인 에이치가.]

 

 

[네에, 귀엽죠? 간식은 괜찮지만 조금만 주셔야 해요. 체중 관리를 시작하면 미움 받거든요. 간식이라 하니 생각난 건데, 저번 주에 공주님이 쿠키를 구웠어요. 다 태우긴 했지만, 에이치가 돌아오면 제대로 만들 거라며 투지를 불태우고 있답니다♪

달콤함을 담아,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토리의 쿠키라니, 정말 기대가 돼. 그러고 보니 어제 누가 간식을 선물했어. 난 입맛이 없어서 몇 개 못 먹었지만, 와타루라면 맛있게 먹을 것 같아서 함께 보내. 친구가 너무 무거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초콜릿과 함께 텐쇼인 에이치가.]

 

 

[보내주신 건 잘 먹었어요. 초콜릿 한 조각쯤이야 잔 다르크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입맛이 없다니 걱정이 되네요. 끼니를 거르고 있는 건 아니겠죠? 만약 그렇다면 이 히비키 와타루가 에이치를 찾아갈지도 몰라요. 최대한 건강을 생각해주세요.

사랑을 가득 담아,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네가 온다니, 오히려 식사에 대한 의지가 사라지는걸. 후후, 물론 농담이야. 최대한 노력해보도록 할게.

저번에 말한 걸 의사에게 물어봤어. 운이 좋으면 다음 달 안으로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아.

희망찬 소식과 함께 텐쇼인 에이치가.]

 


 

 

 

가끔이라고 말한 것과 달리, 와타루는 매일 아침 잔 다르크에게 가방을 매어주었다. 어쩔 때는 하루에 두 번 왔다 갔다 하는 일도 있었다. 와타루는 때때로 그를 너무 고생시키는 건 아닐까 근심했지만, 막상 잔 다르크의 몸을 조물조물 만져본 후에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상하네요.”

 

대신 의문에 가득 찬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잔 다르크는 최대한 태연한 척 고개를 삐걱거리며 눈을 피했다.

 

“분명 더 많이 움직일 텐데, 왜 다른 친구들보다 더 살이 찐 걸까요. 잔 다르크, 밖에서 이상한 사람이 주는 걸 받아먹은 건 아니죠?”

“…….”

“에이치가 간식을 너무 많이 주는 걸지도요…….”

 

잔 다르크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자신은 영 모르겠단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치가 챙겨주는 건포도는 늘 맛있었다. 그야말로 사람 밥 부럽지 않은 맛이었다. 더군다나 조르면 귀여워 죽겠다는 눈을 하고 하나씩 더 챙겨주니, 잔 다르크의 그를 향한 호감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잔 다르크는 어느새 가방을 매고 있지 않으면 아쉽기까지 했다.

 

그와 별개로 흰 건물에 대한 비호감도는 차곡차곡 쌓여갔다. 에이치가 마련해준 푹신한 둥지에 앉아 한가롭게 깃이나 다듬고 있으면, 이따금 누군가 들렸다가 저를 발견하곤 비명을 질렀다. 귀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소리였다. 불쾌한 마음에 방 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으면 에이치가 손을 내밀었다.

 

“놀랐니? 미안해. 네가 있다는 걸 아직 못 들었나 봐.”

 

다정한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희미해졌다. 어느 때는 창문을 열려고 몸을 일으키는 것마저도 버거워 보였다. 얼마 안 있어 침대가 창문 가까이로 옮겨진 것을 보면, 그는 이제 정말로 금방 죽을 것처럼 보였다.

 

죽니 마니 하는 것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으므로, 유감은 없었다. 죽음을 수긍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자신은 매우 용맹하고 씩씩한 비둘기이니, 그가 죽어도 울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 다시는 내려앉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슬픈 것은 사실이다. 에이치의 손은 건조하고 열기가 적어 오래 앉아있어도 덥지 않았다. 그가 부드럽게 제 가슴에 난 깃털을 엄지로 쓸어 내려줄 때면 사랑받고 있다는 감각이 여실히 느껴졌다. 와타루보다는 서툰 손길이었지만, 닿지도 않은 듯한, 깃털 같은, 간지러운, 그 손길에서 잔 다르크는 세상 어떤 보물보다도 귀중한 보물이 된 느낌을 받았다. 할 수만 있다면 와타루가 집에 없는 내내 그의 포근한 손 위에 내려앉아 있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신사답게 굴 수 있는데!

 

하지만 본업을 까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잔 다르크는 그만 일어나야 했다. 그가 열심히 쓴 쪽지를 와타루에게 전해주러 가야지. 벌써 에이치의 병실에서 3시간이나 노닥거렸지만, 시계를 보지 못하는 잔 다르크로서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잔 다르크! 늦길래,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어요.”

 

집에 오자마자 신난 얼굴로 반기는 와타루에, 잔 다르크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너무 놀았나! 에이치의 손에 앉아 건포도 한 봉지를 다 까먹고 있으려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다행히 와타루는 늦은 것에 대해 더 말을 얹지 않은 채 쪽지를 빼갔다. 읽는 내내 그의 얼굴에 기쁨이 만연해서, 잔 다르크는 자기가 아주 위대하고 멋진 일을 한 것 같았다. 이 일이 천성에 꼭 맞는다고, 뼛속 깊이, 이를테면 제 유전자가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와타루는 곧 환희에 찬 얼굴로 잔 다르크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놀란 그가 날개를 푸드덕거려도 와타루는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말 기뻐요! 에이치를 다음 달이면 보겠네요!”

 

뭐라고? 사람 말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음은 집 비둘기에게 얼마나 큰 수치인가. 그러나 잔 다르크는 오랜만에-, 여타 공원에서 구구거리는 제 동족들과 같이 멍한 얼굴로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에이치를 다음 달이면 본다는 것은, 더 이상 와타루가 자신을 통해 쪽지를 보낼 일이 없다는 걸 의미했고, 그러면……, 그건 곧 자신이 에이치도, 건포도도 보지 못한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잔 다르크가 억울함에 가득 차 날개로 와타루의 이마를 가격하자, 그저 그런 날갯짓으로 생각해 가만있던 와타루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잔 다르크, 오늘 뭔가……, 무거운 것 같네요.”

 

잔 다르크는 호흡을 길게 빼고, 최대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움직임을 줄였다. 나쁜 와타루! 자기가 앵무새였으면 백 번도 더 외쳤을 거다. 히비키 와타루는 새의 몸무게를 더없이 가혹하게 관리하는 못된 사람이라고!

 

와타루는 잔 다르크를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끝에는 부드럽게 끌어안고는 속삭였다.

 

“에이치의 향이 나요.”

 

희미한 그리움이 담긴 그 목소리가 아주 조금은 안쓰러웠다. 잔 다르크는 고심 끝에 감형을 선택했다. 백 번은 심했고, 열 번만 외쳐주는 걸로. 나쁜 와타루!

 

 

 


 

[다음 달이면, 늦여름쯤이겠네요. 다행이에요. 이번 년에는 공주님이랑 수영장에 가겠다고 약속한 걸 잊으신 건 아니겠죠? 공주님께서 굉장히 상심해 하고 계셨거든요. 이 소식을 알려주면 신나서 뛰어다닐지도 몰라요.

물론 전 이미 뛰어다니고 있답니다♪ 피네 다 함께 여름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니 주체할 수가 없네요. Amazing!

설렘을 담아,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후후, 글에서도 네 기대가 느껴지는 것 같아. 어깨가 무거워지는 걸……. 최대한 빨리 나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

토리가 슬퍼했다니 가슴이 아파. 하필이면 라이브 도중 쓰러져서 그 아이도 많이 놀랐겠지. 알고 보면 속이 깊은 아이니까, 아쉬운 소리를 삼키게 했는지도 모르겠네. 어리광을 많이 받아주고 싶은데. 유즈루는 어떠니?

걱정과 함께 텐쇼인 에이치가.]

 

 

[집사님은 늘 그랬듯 태연해 보여요. 아마 본인마저 우왕좌왕해버리면 공주님께 악영향이 갈까 걱정이 되는 거겠죠. 역시 연기에 재능이 있는 분이네요♪

피네에는 에이치가 필요하다는 걸 이렇게 한 번 더 느껴요. 에이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 히비키 와타루가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소식을 담아,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응, 나도 금방 돌아갈 수 있도록 힘낼게……♪ ES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아주 간절하거든. 너도, 토리도 유즈루도, 다른 ES의 모두도 정말 보고 싶어.

퇴원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수영장에 가자. 아마 조금 쌀쌀할 테니, 실내 수영장을 하나 대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아니면 1박 2일로 여행을 가는 것도 좋아. 휴양을 빌미로 이렇게나 오래 쉬었으니 조금 더 농땡이를 부려도 괜찮겠지♪

기대에 찬 텐쇼인 에이치가.]

 

 

[Amazing! 여행이라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려요! 느즈막한 오전에 일어나 식사를 즐기고, 잠시 쉰 후에는 물놀이를 즐기다가 호텔로 돌아오면 좋겠어요. 늦은 밤 잠자리에 들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에 들면 어떨까요. 공주님과 집사님도 정말 좋아할 거예요.

저는 그때까지 에이치를 위한 Amazing을 잔뜩 준비해 놓을게요. 깜짝 놀라 쓰러지시면 다정히 안아드릴 테니, 걱정 마시길♪

넘치는 기대를 가득 담아,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잔 다르크는 식량을 직접 구하고, 둥지를 지어 잠을 자는 길거리 생활을 생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소위 말하는 야생성이나 생존본능 같은 것이, 도로나 인도, 공원 벤치에서 구구대는 그 친구들보다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런 잔 다르크라도 에이치가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끊이지 않는 기침, 경련하는 손끝, 삐, 삐, 삐, 귀를 울리는 사나운 경보음, 그 모든 경고의 신호로부터.

 

잔 다르크는 진심으로 그를 살릴 방법을 궁리했다. 조그만 머리통으로 이리저리 경우의 수를 대보며 고민했다. 따뜻하게, 배부르게, 편안하게. 그러나 제가 생각한 그 모든 것들을 에이치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소독약의 냄새가 머리 한 쪽에 넘실거리며 흘러왔다. 너도 와타루가 돌봐주면 나을까? 막연히 고개를 갸웃거려볼 뿐이다.

 

에이치가 죽으면 그도 분명 슬퍼하겠지. 시트에 묵직한 소리를 내며 투둑, 하고 떨어져 내려 검붉게 스미는 핏덩이에, 잔 다르크가 잔뜩 깃을 부풀렸다. 혈향이 지독했다. 아마 텐쇼인 에이치는 정말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답장이 없나요?”

 

아쉬운 얼굴로 그렇게 묻는 친구에게, 잔 다르크는 뭐라 답할 말이 없었다.

 

 

 


 

[가방에 답장이 들어있지 않았어요. 오다가 누락된 걸까요?

잔 다르크가 하루 종일 창문 앞에 서 있어서, 에이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싶어 걱정이 돼요. 괜찮나요? 보러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쪽지가 그대로 돌아왔어요. 아마 확인하지 못한 거겠죠. 에이치가 언제 쪽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쪽지를 보낼 거예요. 확인하게 되면 바로 짧게라도 답장을 보내주세요.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편지를 이어가는 건 슬픈 일이네요. 짝사랑이 이런 느낌일까요? 후후. 지나고 나서야 소중함을 느낀다니, 문학 작품의 클리셰 같은 이야기네요. 답장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이 에이치에게 상냥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해요.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사실, 며칠 전에 공주님의 성화를 못 이겨 다 함께 병원에 갔었어요. 바로 퇴짜를 맞아 시무룩하게 돌아왔답니다. 공주님이 아주 많이 울었어요. 얼굴을 못 본 지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가니, 그럴 만도 하죠.

몸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건 알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만나줄 수는 없을까요? 에이치가 정말 그리워요.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제가 몰래 당신 병실에 갈까요. 아마 들키면 혼나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겠죠. 이제는 어른이니까요. 그곳이 텐쇼인 가의 저택만큼 보안이 철저하지도 않을 테지만, 만약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거겠죠.

제가 접은 쪽지의 모양이 달라지진 않았을까 매번 확인해요. 이제는 쪽지가 수백 개 쌓여있어도 제 쪽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에이치의 쪽지는 수천 개 사이에 단 하나 숨어있어도 찾아내겠죠.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얇은 종잇조각이라도 쌓이다 보면 제법 부피를 차지했다. 빵빵하게 부푼 가방을 맨 잔 다르크가 안쓰럽게 보이기 시작해서, 와타루는 가방을 매어주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제 더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 동안 고마웠어요, 잔 다르크.”

 

수심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잔 다르크가 푸드덕대며 쪼아대도 도로 가방을 매주는 일은 없었다. 대신 쪽지를 바르게 펴 한 장 한 장 벽을 장식한 줄에 집었다. 얇고 긴 갈색 줄이 금세 쪽지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잔 다르크는 열리지 않는 창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으면, 산책을 나가려는 다른 비둘기를 막듯이 와타루가 부드러운 어조로 타일렀다.

 

“날이 추워서 안 돼요. 밖에 눈 오는 거 보이죠?”

 

눈. 그 차디찬 울림에 잔 다르크는 꼬리 깃을 바짝 세웠다. 한 겨울이 오면, 그토록 추운 바람이 오면, 에이치는 분명 죽을 것이었다. 그가 죽기 전에 꼭 저 종이들을 전해주어야 했다. 제 친구가 밤마다 정성과 시간을 들여 쓴 것이었다. 전해지지 않으면 그가 많이 울 게 분명했다. 와타루가 우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잔 다르크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잔 다르크는 비밀임수를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에이치가 죽는 걸 상상해본 적이 없어요. 신기하죠. 당신이 죽은 뒤에 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늘 고민했었거든요. 당신을 어떻게 기억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당신이 죽어도 죽지 않은 것처럼 살 수 있을까, 하고. 당신을 추억할 방법을 아주 많이 생각해뒀어요. 그런데 막상 일이 닥치니, 그 방법들이 모두 소용이 없단 생각이 드네요. 에이치를 건강하게 추억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공주님이 쿠키를 굽는 데 성공했어요. 잔뜩 의기양양해 하시며 집사님과 함께 쿠키를 포장했답니다. 위에 올라간 하트 모양의 아이싱이 달콤했어요. 꼭 에이치에게 전해주라며 당신 몫의 쿠키도 받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고 말씀을 못 드렸어요. 겁쟁이가 된 느낌이네요.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오늘 첫눈이 내렸어요. 집사님과 공주님과 함께 놀러 나갔는데, 집사님이 공주님의 함정에 걸려서 눈을 잔뜩 뒤집어썼답니다. 깜짝 놀라 굳은 얼굴이 굉장히 재밌었어요. 제가 공주님을 몰래 도와준 건 비밀이에요. 공주님 성격에 알면 분해하시지 않겠어요? 에이치와 함께 왔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했어요.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오늘 티 세트를 하나 샀어요. 유리로 된 찻주전자와 희고 고풍스러운 찻잔, 깔끔한 디자인의 티스푼이 함께 랍니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 창가에서 따뜻한 홍차를 함께 즐기면 참 좋을 거예요. 옆에 벽난로가 있으면 로맨틱하겠죠. 에이치는 그런 것을 로맨틱하다고 느끼지 않을까요. 그럼 다정하게 서로 몸을 기대앉으면 어떨까요. 후후. 에이치가 좋아할 것 같아요. 겨울이 가기 전에 그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요.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와타루는 저녁 일찍 집을 나갔다. 그의 평소 생활패턴을 고려하면, 내일 아침이나 들어올 게 뻔했다, 어쩌면 예상치 못하게 일찍 들어올 수도 있고. 잔 다르크는 전자에 희망을 걸고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구석에 놓인 가방을 건드려 보았지만 어떻게 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손이 없는 잔 다르크는 가장 두꺼운 쪽지를 입에 물었다. 쪽지를 집게에서 빼내겠다고 용을 쓴 부리가 뻐근했지만, 잠깐만 물고 날아갔다 오면 그만이니 괜찮겠지 싶었다.

 

창문 앞에 서니, 밖의 서리어린 바람이 벽을 긁는 소리가 살벌했다. 몸에 열도 낼 겸 잔 다르크는 몸을 한 번 파드득 떨었다. 날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세 굳은 날개가 깃 하나까지 똑바르게 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한겨울에는 나가는 일이 좀처럼 없다 보니, 저절로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되었다.

 

창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와타루와 함께 사는 새들은 하나같이 똑똑하고 영리했으므로, 창문을 잠가두는 것으로는 외출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틀에 난 작은 홈을 발톱으로 몇 번 긁는 것으로, 잔 다르크는 굳게 닫힌 창문을 손쉽게 열었다.

 

눈발 섞인 바람이 날개와 몸통 사이를 파고들어 지나간다. 바람이 얇게 스미며 높게 울었다. 잔 다르크는 작은 귀로 겨울의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자신은 그곳에 가야 했다. 뼛속 깊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있죠, 곧 에이치의 생일이에요. 알고 있나요? 당신은 언젠가 생일이 겨울인 것에 불만을 드러냈었죠. 계절만 바뀌면 유난스럽게 구는 몸 때문에 곱게 생일파티를 즐겨본 적이 없다면서요. 생일선물을 가져온 제 손을 꼭 붙잡고, 생일날 네 품에 안겨 죽을 수 있다면, 나름대로 로맨틱한 죽음이 될 것 같아. 하고 말한 적도 있었죠.

정말 나빴어요. 불법행위를 감행하면서까지 추운 겨울날 철통 보안을 뚫고 찾아온 연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 말이 끝난 직후 당신 입술에 키스를 했지만, 더 이상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입막음에 가까웠죠.

크리스마스를 건너, 신년 인사를 하고 나면, 숨 돌릴 틈 없이 당신 생일이 찾아오죠. 에이치는 바람이 차가워지면 한숨을 쉬곤 했어요. 생일마저도 하나의 업무가 되는 텐쇼인으로서의 숙명인 거겠죠. 에이치에게 겨울은 춥고, 피곤하고, 가혹한 계절이었을 거예요.

그래도 당신은 겨울에 죽지 않을 거예요.

어느 따뜻한 봄날에 죽어요. 4월이 어떨까요. 봄꽃이 만연하고, 하늘은 맑고 청명한 데다, 건조한 산들바람이 살랑일 쯤. 당신이 나이 든 얼굴로, 꼭 행복한 표정을 짓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거예요. 주름이 자글자글한 당신 손을 곱게 맞잡은 나도 거기 있겠죠. 늘 그랬듯 에이치에게 사랑을 속삭이면서, 마찬가지로 나이 든 얼굴을 하고.

그때는 제 품에서 죽고 싶다는 그 말이 밉지 않을 거예요. 기꺼이 제 품을 당신 무덤으로 내어드릴게요. 그러니 그 날까지만, 제 곁에 있어 주세요. 내 사랑.

텐쇼인 에이치의 히비키 와타루로부터.]

 


 

 

 

잔 다르크는 창틀에 내려앉아 있었다. 눈보라 치는 소리에 귀는 먹먹하고, 사위는 검게 내려앉아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눈발에 가리어지는 날이었다. 그래도 잔 다르크는 불평 없이 찬 바깥에 흔들리는 가벼운 몸을 간신히 고정한 채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동공 위로 빨간 불빛이 느린 속도로 껌뻑였다. 에이치의 손을 붙잡은 채 고개를 숙인 와타루는 그렇게도 슬퍼 보였다. 뭐라고 속삭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입술이 느릿하더라도 끊임없이 뭐라 움직이고 있었다. 힘주어 올라간 어깨며 에이치의 한 손을 기도하듯 쥔 두 손이 안쓰러웠다.

 

에이치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기도 했고, 또 어쩔 때면 깃털 같은 손길로 와타루의 손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세상 어떤 보물보다도 귀중한 보물을 어루만지는 손길이었다. 그러면 와타루는 더 깊이 고개를 숙인 채 무어라 속삭였다. 그의 이마쯤에 기대어진 에이치의 손가락 마디가 겨울 그림자 속에서 물기로 창백하게 반짝거렸다.

 

잔 다르크는 거기까지만 보고 도로 집으로 돌아왔다. 눈이 잔뜩 묻은 몸이며 날개를 털어내고 있자니, 열린 창문 새로 들어온 찬바람에 깬 다른 비둘기들이 구구 하며 불만을 토로했지만, 잔 다르크는 제 부리에 물린 채 눈바람 사이를 해치는 동안 구겨지고 젖은 쪽지가 더 신경 쓰였다. 이걸 어쩐담. 그러나 심각한 정도는 아니고, 다만 아주 약간 아쉬울 뿐이었다. 굉장히 두꺼운 종이였는데. 입에 물어보니 맛도 영 불쾌하지 않고 참을 만 했는데. 좋은 물건이 망가졌다, 딱 그 정도의 감상.

 

당연한 일이었다. 전해달라던 사람이 전해줄 사람에게 직접 갔다. 심부름꾼이 할 일이 뭐가 더 있겠는가. 잔 다르크는 곧이어 책상 구석에 쪽지를 덩그러니 남겨둔 채 제 둥지에 돌아왔다. 아직 차가운 제 깃 끝을 목이며 머리에 비벼 데웠다. 둥지는 늘 그랬듯 포근했으나, 잔 다르크는 또 아주 약간 섭섭해지는 것이다. 약 냄새가 나는 하얀 시트 옆, 언제나 저를 위해 마련되어 있던 푹신한 둥지. 건조하고 열기가 적은 두 손. 닿지도 않은 듯한 쓰다듬. 상냥한 웃음. 그것들이 영영 사라졌다는 것에 대하여.

 

 

 


 

와타루는 그로부터 이틀 후에 집에 돌아왔다. 그동안 외로움과 아주 약간의 간식 부족을 경험하고 있던 비둘기들이 다 같이 시위를 하고 나섰다. 추운 겨울밤 겁도 없이 바깥나들이를 하고 온 잔 다르크는 간간히 기침을 콜록거리며 구석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와타루는 3일 치의 식사와 간식을 더 챙겨준 후 도로 밖으로 향했다. 검은 옷이 그에게 참 안 어울렸다.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앉은 그의 얼굴도, 그것을 보고 순식간에 점잖게 굴기 시작한 비둘기들도 참 낯설었다.

 

어쩌면 모두가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비둘기들은 현관문 소리에 유난을 떨며 구구거렸고, 히비키 와타루는 미리 사놓았던 검은 정장을 한참이나 바라만 보았으며, 히메미야 토리는 혼절할 듯 고개를 저으며 울었다. 후시미 유즈루는 영정 사진 가까이에도 가질 못했다. 코앞까지 왔을 때 이미 알고 있었는데, 정작 닥치고 나니 거짓말 같았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이츠키 슈가 화려한 무대의상을 입은 채 와서는 입술만 깨물다 간 것은, 사쿠마 리츠가 장례 첫날 얼굴도 비추지 않은 것은, 그러한 연유일지도 몰랐다.

 

장례를 책임지고 맡아주겠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약속을 했는지. 하스미 케이토는 코웃음을 치며 해맑은 표정을 한 제 소꿉친구를 노려보았다. 가장 오래 했던 친구가 길을 달리 했는데 정신 멀쩡하게 거사를 담당할 초인이 어디 몇이나 있다고. 어린 날의 치기에 못 할 말을 지껄였다. 장례를 주관하는 것도 처음인데, 그야말로 못 봐줄 수준이었다. 향을 피우다가 재에 손이 데였다. 덜덜 떨리는 손이 아직 빨갛게 타는 재를 손등에 떨궜다. 어찌나 아픈지, 그 자리에서 악, 하고 작게 소리를 질렀다가, 고개를 숙인 그대로 울음이 새어 나와 무너져 내렸다.

 

지독한 사람이었다. 잔인하기는 어디 비할 데도 없고, 악독하기로도 이름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몸으로 태어나 이토록 크고 유의미한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와타루는 그런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제 삶에 다시없을 발자국을 남긴,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애틋한 사람. 아마 평생토록 그를 추억하며 살 것이라고. 나는 어느 4월에, 주름진 내 두 손을 꼭 맞잡은 채로, 그 사이에 있었던 당신의 희고 창백한 손을 가만히 떠올려볼 것이라고.

 

담요에 돌돌 말린 채 얌전히 수발 받는 잔 다르크가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음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