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육의 천사

하늘바다

Liee 2025. 3. 21. 12:10

잭레이

2018년도 백업 

 

 

 

커튼의 구멍 사이로 비춰들어오는 불빛에 레이첼이 두 눈을 찌뿌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집이지만, 커튼은 언제 한 번 맘먹고 다 기워야 하지 않을까. 레이첼은 제 포셰트 안에 커튼을 꿰맬 만큼의 실이 남았을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불가능하면 그냥 커튼을 떼어버리고 이불을 달아버리자. 커튼을 이불로 쓰면 되지. 하지만 그것을 오늘 밤 바로 시행할 수는 없었던 터라, 레이첼은 평소와 달리 희미하게 분노가 새며든 얼굴로 일어나 커튼 쪽으로 다가섰다. 아직 밤은 한창일게 분명했다. 오늘은 달이 어찌나 밝은지, 잭이 절 데리러 왔던 날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그날은, 달이 지구를 집어삼킬듯 커다랗고 둥글었는데. 레이첼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조심 바닥을 걸었다. 바닥은 잭이 쓰고 아무렇게나 버려둔 붕대, 저가 실수로 깨먹은 유리잔 파편 등의 온갖 잡동사니로 위협적이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구멍 사이로 스쳐드는 달빛을 눈부시게 반사하는 유리 파편을 보며, 레이첼은 아프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레이첼은 지난 달에 그레이가 보내준 생활비를 떠올리며 커튼을 매만졌다.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저축하면, 3개월 쯤 후에는 커튼을 하나 살 수 있을지도.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 커튼의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보던 레이첼이 문득 구멍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바다였다. 홀린 듯 레이첼은 커튼을 확 열어젖히고 베란다로 다가섰다. 뒤쪽에서 욕 비슷한 말을 중얼거리며 뒤척이는 잭은 중요치 않았다. 레이첼은 제 푸른 눈에 검은 바다가 한가득 물드는 줄도 모른 채 반짝거리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니, 적어도 레이첼의 눈에는 그것은 하늘이 아니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것은 새까만 바다였다. 푸른 고래가 등을 보이며 헤엄치고, 반짝거리는 해파리가 저 멀리서 손짓하는, 눈부신 물고기들이 동그랗게 모여들어 빛을 쏟아내는. 레이첼은 푸른 눈 속에 그 모두를 담았다. 잭이 마구잡이로 엉켜드는 빛줄기를 이기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나 성큼성큼 다가온다. 중간에 달그락, 하는 유리조각 소리가 들려온 것 같기도. 레이첼은 제 어깨를 잡는 잭을 올려보았다.

 

"뭘 하는 거야 오밤 중에. 눈부셔서 잠을 못 자겠잖아!"

"미안 잭, 바다가 예뻐서.."

"아? 바다가 여기 어딨다고?"

 

잭의 말대로, 인적 드문 시골에 위치한 산에 자리잡은 주인없는 별장에서 바다가 보일 리 없었다. 레이첼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새하얀 손가락으로 검은 밤하늘을 가리키고 말했다. 저길 봐, 잭. 눈살을 찌뿌린 잭이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눈부셔 죽겠는데 어딜 보란 거야-. 짜증에 일렁이던 검은 눈동자가 고요히 잦아든다. 레이첼은 그것을 보고 곧장 총총총 잭의 정면으로 다가섰다. 어때? 보여? 하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밤하늘을 머금은 반짝이는 잭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레이첼이 반쯤 열린 입을 다물었다. 그제서야 제 앞에 다가선 레이첼을 눈치챈 잭이 물었다. 예쁘긴 하네,

 

"그런데, 바다가 어딨다고?"

"..날 들어올려주면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

"아, 귀찮게 하네..."

 

잭은 레이첼의 여린 몸을 번쩍 들어올려 안았다. 작은 몸은 가녀리고 따스했다. 잭은 그제서야 제 몸이 밤공기에 차게 물든 걸 눈치챘다. 붕대밖에 안 감은 상체가 레이첼의 손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찼다. 잭은 온기가 가득한 레이첼을 조금 더 가까이 안고 물었다. 그래, 바다가 어딨다고? 제 딴에 꽤 상냥하게 말한단 게 확연하게 보이는 잭의 어투에 레이첼이 그의 눈동자를 조금 더 바라보다가, 자그마한 손으로 잭의 왼쪽 눈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여기에 있어."

"..뭐?"

"잭, 눈동자 안에 바다가 있어."

 

그런 레이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잭이 얼굴을 와락 찌뿌리곤 말했다. 뭐냐, 그 눈깔병신이랑 있으니까 너도 병 걸렸냐? 레이첼은 그 소리가 재미있는 장난이라도 된다는 듯 배시시 웃어보이고는 잭의 얼굴을 붙잡고 머리를 가까이 했다. 움찔, 하고 물러서는 잭은 아랑곳하지 않은 레이첼은 그대로 검은 눈동자를 조금 더 깊이있게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레이첼의 눈과 마주보게 된 잭이 조용히 푸른 눈동자를 감상했다. 선연한 푸르른 눈동자는 가볍게 일렁이며 제 눈동자를 무슨 미술품이라도 보듯 뜯어보고 있었다. 잭은 그것이 언젠가 보았던 찢어진 여행 안내책자에 나온 눈부신 바다같다고 생각했다. 새벽해가 떠오르는 도중의, 해가 반쯤 바다에 발을 담그고 걸쳐앉은 듯한 모양새의 그 바다. 잭이집중으로 반짝이는 두 눈동자에 잭이 막 빠져들기 시작할 때쯤,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바다가 있어.

 

"..그러네."

"잭도 보았어?"

 

그래, 봤어. 레이첼은 작은 대답에 다행이라고 말했다. 레이첼은 잭이 제 뒤에 있는 검은 바다를 바다로 본 줄 알았다.  거울도 없는데 자기 눈동자를 들여볼 수는 없었을 테니까. 레이첼은 잭이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못 본 것이 못내 아쉽기는 했지만은, 하늘을 보며 바다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만족했다. 잭은 한없이 어설픈, 하지만 제법 그럴싸한 만족감이 깃든 미소로 물들여진 얼굴을 보고 약간의 충동에 휩싸였다. 이 녀석이 이렇게 예쁘게 웃을 순간이 더 얼마나 올까. 지금 죽여야 할까? 하고. 잭은 침대에 기대져 있을 제 낫을 머리속으로 떠올렸다. 그 순간 레이첼이 잭에게 포옥 안겨들었다. 흰 가디건이 차갑게 식은 피부를 달군다.

 

"졸려, 잭."

"..내가 택시냐."

 

말은 퉁명스럽게 하면서도, 잭은 더 불평하지 않고 곱게 그녀를 안고 침대 쪽으로 다가섰다. 오늘은, 오늘은 아냐. 졸려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죽일 수는 없지. 잭이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는 동안 레이첼은 수마가 내려앉은 금빛 속눈썹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잭이 발을 딛은 곳마다 피투성이다. 역시, 유리소리가 예사롭지 않더라니. 레이첼은 제가 더 깊은 잠에 빠져들기 전에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잭의 입술이 내려앉는다. 레이첼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 화상 자국으로 거칠거칠한 입술이 더 침범하지 않은채 버드키스를 선사하곤 떠난다. 레이첼은 바다가 가신 검은 눈 대신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저가 있었다. 레이첼은 잠결에 물었다. 잭,

 

"날 사랑해?"

"..."

 

잭은 가만히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수마가 집어삼켰다가 뱉어내기라도 한 듯 잠이 질척이는 눈동자였다. 잭은 그녀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레이첼은 벌써 꿈 속에 잠긴듯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감았다. 잠결에 희미하게, 늘 듣던 고양이의 퍼링과도 비슷한 사나운 목소리가 레이첼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모른다고, 그딴 거. 레이첼은 푸른 눈을 눈꺼풀 사이로 희미하게 보였다가, 한낮의 해같은 속눈썹 사이로 눈동자를 파묻어버렸다.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