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접지몽.
쵸로마츠는 눈 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다 꿈이야, 이건 다 꿈이야, 개같은 꿈. 속이 메스꺼워서 토할 것 같았다. 손끝이 질퍽했다. 흐릿한 웃음소리가 간신히 귀에 닿는다.
"쵸로마츠, 울어?"
눈앞이 흐릿해서 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뜨니 그제서야 네 얼굴이 조금 선명하게 보였다. 피범벅이 된 채로 넌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 조금 괴로운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간에 상황은 최악이었다. 네 어깨에 난 구멍에서 피가 앞뒤로 철철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끝으로 네 볼에 묻은 피자국을 문질러 닦았다. 목소리가 흔들렸다.
"꿈이지, 이거.. 그렇잖아, 아니면, 이럴.. 이렇게 될 리가 없잖아.."
너는 잠시 말이 없다가, 내 목에 축축한 팔을 감아둘렀다. 나는 네 소매를 물들인 그것이 네 피가 아니길 바랐다. 그렇지만 그것은 앞뒤 상황으로 본들 지금 네 꼴을 본들 영락없는 네 피였다. 다 스러져가는 목소리로,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장난기어린 어조로, 내 귓가에 속삭인다.
"네 말대로, 꿈이야. 쵸로마츠."
그도 그럴 게, 나 이미 죽었는걸.
*-*-*
악, 소리를 지르며 깼다. 옆에서 이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자, 네가 세상 모르는 얼굴로 곤히 자고 있었다. 연한 하늘색 잠옷, 그리고 그 옆으로 주욱 늘어져 누워있는 형제들. 아, 밤이지. 달빛이 커튼 너머로 희미하게 드는 한밤중이었다. 우리는 부모님에게 얹혀사는 20대 초반의 썩을 니트 여섯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나는 멍한 정신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불을 들췄다. 내 오른쪽에 얌전히 누운 네 어깨에 핏자국같은 것은 없었다. 너는 죽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자고 있는 것이었다. 네 가슴이 숨소리에 맞춰 올라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이불을 들춘 탓에 추운지 몸을 웅크리며 내 쪽으로 붙기도 했다.
이상한 꿈이네, 방금 거. 니트가 총에 맞아 죽을 일이 뭐가 있다고. 나는 슬그머니 이불 속으로 도로 몸을 파묻었다. 기분 나쁜 꿈이었을 뿐이야. 계속 그렇게 되뇌는데도 손끝에는 꿈 속에서의 떨림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나는 조심히 네 몸을 끌어안았다. 이마가 닿기 직전까지 얼굴을 가까이 하니, 네 숨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분명 네가 옆에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데도 불안이 가시지 않아서 몇 번이고 속으로 뭐라뭐라 중얼거려야 했다.
마츠노 오소마츠는 죽지 않았어. 여기에 살아있어. 숨을 쉬면서,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내 바로 옆에.
불안한 눈을 겨우 감고 떠보니, 주변이 밝았다. 그리고 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놀라 소리도 못 지르고 굳어있자, 네가 웃으며 물었다. "뭐야, 이거? 어리광 피우는 거?" 장난스레 허리를 감싼 내 팔을 톡, 톡, 두드린다. 아침부터 헛소리하지 말라고 받아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뭘 하려고 했더라, 생각하기 무섭게 카라마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으음-? 브라더, 오늘은 좋아하는 아이돌의 팬사인회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왜 아직까지.."
"-아아!!!"
시발, 어떻게 까먹어도 그걸..! 급히 시계를 확인하니 시침이 벌써 12시 너머를 가리키고 있었다. 팬사인회가 언제였더라, 아마 1시였던 것 같다. 벌써 대기줄이 길게 쫙 늘어섰겠지. 내 앞에서 끊기면 어쩌지. 대충 카라마츠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옷을 갖춰입었다. 초조해 죽겠는 와중에 네가 태평하게 말을 걸었다.
"쵸로마츠-, 오늘은 형아랑 놀아주면 안 돼? 응?"
"웃기지 마. 몇 달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하는 냐쨩의 사인회라고. 무조건 가야지."
"몇 달에 한 번? 기다리면 또 온다는 말이잖아. 다음에 가."
"그러는 너는 내일도 나랑 놀 수 있잖아."
"내일은 내가 죽었을지도 모르잖아."
저게 무슨 헛소리야. 나는 셔츠의 단추를 잠그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네 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한다. "그럴 리 없잖아. 니트 주제에 죽을 일이 뭐가 있다고." 마지막까지 단추가 딱 두 개 남아있었다. 그냥 현관까지 가면서 잠글까. 빨리 뛰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옮겼다. 가방을 챙겨들고 뛰다가, 문득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단 걸 깨닫는다.
"-오소마츠 형?"
"응? 왜?"
문 뒤에서 쏙 얼굴만 빼내밀며 대답한다. 어젯밤 꿈 때문인가, 괜히 이상하게 이러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대답하고는 팬사인회장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어젯밤 꿈이라는 거, 뭐였더라? 운좋게 받은 사인앨범을 가방 안으로 갈무리하며 생각한다. 아니지, 지금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나는 가방 안을 힐끔 바라봤다. 앨범커버는 연두색과 핑크색이 섞인 무언가였다. 구불구불하게 쓰인 검은 선, 아마 사인이겠지. 가슴 깊은 곳에서 만족감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집에 도착하니 해가 저물 쯤이었다. 노을이 피처럼 붉었다.
그리고 피비린내가 났다.
나는 연두색 다다미의 사이사이로 피가 고인 것을 눈에 담았다. 양말에 미지근한 뭔가가 스며들어온다. 네 어깨에서는 피가 울컥 쏟아지고 있었고, 너는 바닥에 축 늘어진 채로 웃으며 날 보고 있었다.
*-*-*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거야-! 그만 정신 차리라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찌르듯 울려왔다.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한 토도마츠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단정한 정장, 흰 셔츠. 침대는 붉었다. 붉은 이불이 덮힌 킹사이즈 침대. 왕의 방은 있어 보여야 한다고 말하며 네가 말했었다. 네 침대였다. 그런데 나 뿐이었다.
"뭘 찾는거야, 휴대폰?"
"아니, 오소마츠.. 폐하 어디 계셔?"
"..지금, 그게 무슨.. 아. 진짜 미치겠네."
토도마츠가 답답하단 듯이 머리를 헤집다가,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한 자 한자 씹어뱉듯 말했다. 어깨를 누르는 손이 사뭇 진지했다.
"쵸로마츠 씨, 기억 안 나?"
"뭐가. 아니 그것보다, 폐하 어딨냐고."
"돌아가셨잖아. 3달 전에."
-뭐라고?
토도마츠는 애진작에 장례식까지 끝나지 않았냐며 물었다. 그러면서 내가 입은 옷을 가리켰다. "뭐, 3년상이라도 치를 거야? 언제까지 그 옷 입고있을 건데?" 내가 입은 옷은 온통 검은 정장이었다. 새빨간 이불과는 도무지 안 어울리는 정숙함이었다. 토도마츠는 멍하니 검은 옷에 눈을 고정시킨 나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다가, 손을 휘적거리며 방을 나갔다. "됐어. 오늘도 그런 상태면 나와도 일은 못 하겠네." 토도마츠가 나가니 방은 적막했다. 너무 조용해서 밤같았다. 아니, 지금은 밤이었다. 방은 어둠에 물들어있었고, 새빨갛다고 생각한 이불은 검붉었다.
누가 죽어? 머리가 어지러워서 제대로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분명 살아있었잖아. 너 없는 침대가 비현실적으로 차가웠다. 밤바람에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죽지 않았어. 죽었을 리가 없어. 마츠노 오소마츠가 죽는다니, 말도 안 되잖아.
그렇지만 네 소매는 축축했다. 다다미에서는 피비린내가 났고, 너는 어깨에서 피를 흘렸다. 토도마츠는 네가 죽었다고 말했다. 나는 상례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 적어도 그 중 2개는 사실이다. 아니,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매니, 다다미니 하는 것들은 어디서 나온 얘기지? 생각하고 있자 쾅, 하는 소리가 들리며 거칠게 문이 열렸다. 쥬시마츠였다. 성큼성큼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는다. 햇빛에 얼굴이 밝게 빛났다.
"쵸로마츠 형아, 꿈 꿔본 적 있슴까?"
어딘가 둥실거리는 목소리. 얕은 현실감. 쥬시마츠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어조로 정신없이 물었다.
"있지, 꿈 속에서 사람은 자기가 꿈 꾸는 줄 전혀 모른데. 갑자기 있던 곳이 바뀌고, 한순간에 햇님이 지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행동해도 전혀 모른데. 완전 신기하지 않슴까? 뒤죽박죽인 세상에서 하루의 3분의 1을 살면서도 전혀 기억하질 못해. 꿈꾸는 그 순간에마저도 그 전을 까먹으면서 산다는 거! 엄- 청 이상하지!? 대박!!"
왜 갑자기 꿈 얘기를 하는 거야? 꿈이 뭐 어쨌다고?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귀 근처에서 웅웅거리는 소리와 이상하게 아파오는 머리 때문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문제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이 거북한 두통과 이명을 없애는 것이 급했기에, 나는 서둘러 쥬시마츠에게 다음을 물었다. 쥬시마츠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듯 웃어보이곤 내 손을 잡았다.
"응, 형아. 쵸로마츠 형이 괜찮다는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곤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육둥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지, 표정이 없는 쥬시마츠의 얼굴은 꽤 널 닮아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생각에 잠겨있을 때의 너와 많이 닮아보인다고 해야하나. 멍하니,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문득 느껴지는 기시감에 고개를 내렸다. 손에서 옷감의 감촉이 나지 않았다. 길게 늘어져있던 소매가 줄어있었다. 색도, 실크 재질의 흰색 대신 밝은 붉은색이다. 나는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내 손을 잡은 건 너였다. 네가 무표정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눈앞이 일렁거렸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꿈이 깼을 때, 내가 죽었다면 충격이겠지. 미리 대비해보는 거야? 귀엽네, 쵸로마츠."
"..."
"머리 아파? 이제 가는 거야? 이게 마지막일지도 몰라. 날 충분히 본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애초에, 널 '충분히' 본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데?"
부서져내리며 네가 웃었다.
"역시 그렇지. 그치만 이건 다 거짓말이야."
*-*-*
하늘은 옅은 회백색이었다. 크게 들이쉰 숨은 시리도록 차가웠고, 희미한 담배냄새가 섞여있었다. 네가 옆에 쪼그려 앉아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머리에 붉게 들어간 브릿지가 새벽공기에 바래있다. 나는 재떨이 위에서 사그라드는 불씨를 바라보다가, 네 옆에 앉았다. 옆테가 유려한 얼굴이 내쪽을 슬쩍 바라보고는 활짝 웃는다.
"왜? 제이드도 한 대 피우게?"
"..아니. 별로."
"그럼? 내 얼굴 보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까이 닿고 싶었고, 너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바람은 불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몸이 떨려서 네 옆으로 발을 달싹거리며 더 붙었다. 네가 키득거리며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나는 네 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너는 기껏 불을 붙인 담배를 재떨이 위에 올려두고 타들어가는 것을 보고있었다. 다행이라 여긴다. 난 네가 담배니 술이니 하는 것들을 즐기는 걸 싫어했으니까. 저렇게 놀다가 짐짓 위험한 쪽에 눈을 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약이라던가. 그러고는 나는 헛웃음을 입에 머금으며 곧장 그 생각을 부정했다. 약이라니, 잘 나가는 연예인이 할 짓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대담하지.
담배연기가 다 사라질 쯤에야 너는 입을 열었다. "있잖아, 내가 죽으면 어떨 것 같아?" 연인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의 시작으로서는 꽤 전형적이었다.
"그런 건 왜 물어? 당연히 빡치겠지."
"빡쳐? 슬픈 게 아니라?"
"잘 사는 누구 가출까지 시켜놓은 주제에 먼저 죽어버리면 당연히 빡치지."
"에-, 너도 분명 좋아서 나온 거였잖?!"
네가 와락 소리치며 웃었다. 건물, 하늘, 주변의 모든 것들이 흐릿한데 네 얼굴만 선명하게 보였다.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 네가 떠난 어깨가 차가워서 허리를 붙잡고 내게 도로 끌어당겼다. 너는 별 저항없이 도로 내 어깨에 기댔다. 나는 당연한 몇 문장을 속으로 떠올렸다. 너는 죽지 않았어. 여기에 살아있어.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슬펐다. 너는 여기에 살아있다. 숨을 쉬면서,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내 바로 옆에.
"그래도, 장례식 정도는 갈게."
"..."
"매년 무덤에 찾아갈테니까, 죽기 전에는 무슨 꽃을 사가줬으면 하는지나 골라놓고 죽어."
"..."
"너가 죽고나서 평생을 혼자 살지도 몰라, 네가 그렇게 해달라고 말하면.."
울음이 치밀어올라서, 말을 채 다 이을 수가 없었다. 너는 줄곧 대답이 없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리란 걸 알고있었기 때문에 슬펐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네 몸을 내게로 더 당겼다. 너는 그저 힘없이 내게로 늘어졌다.
"..너,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어."
"뭐라고 대답할 것 같은데?"
다 스러져가는 목소리,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장난기어린 어조. 나는 울음을 참으려 아프도록 턱에 힘을 줬다. 네게 '죽어달라고 말해.' 라고 한 적이 있었다. 너는 그때 죽어가고 있었고, 나는 의식이 끊어질 때까지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뭐라고 대답할 것 같냐고?
"-내가 널, 어떻게 알아.."
내가 꾸며낸 꿈 속의 너는 결코 너가 될 수 없다. 너라는 사람은 종잡을 수 없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만들어낸 너가 진짜랑 똑같을 리가 없잖아. 전부 엉터리였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서, 일어나면 네가 세상에 없을까봐, 그래서 그 엉망진창인 환상을 너라고 믿으려 했다.
너는 대답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옆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재떨이도, 다 타서 재가 된 담배도, 새벽하늘도, 건물도 없었다. 나밖에 없었다. 이제는 꿈속에도 너가 없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
쵸로마츠는 눈 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다 꿈이야, 이건 다 꿈이야, 개같은 꿈. 속이 메스꺼워서 토할 것 같았다. 손끝이 질퍽했다. 흐릿한 웃음소리가 간신히 귀에 닿는다.
"쵸로마츠, 울어?"
눈앞이 흐릿해서 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뜨니 그제서야 네 얼굴이 조금 선명하게 보였다. 피범벅이 된 채로 네가 해사하게 웃고있었다. 뭐가 좋다고 웃는 거야, 지 어깨에 바람구멍이 났는데. 나는 떨리는 손끝으로 네 볼에 묻은 피자국을 문질러 닦았다. 목소리가 흔들렸다.
"꿈이지, 이거.. 그렇잖아, 아니면, 이럴.. 이렇게 될 리가 없잖아.."
"-꿈처럼 느껴져? 섭섭하네-, 나, 진짜 아픈데. 자기는 안 아프다고 꿈 취급하는 거?"
"지금 농담이 나와, 너?"
"너가 그렇게 구니까, 하게 되잖아."
'그렇게'가 뭔데? 너는 잔뜩 일그러진 내 얼굴이 재밌는지 몸을 들썩여가며 웃었다. 네가 웃을때마다 어깨에 난 구멍에서 피가 울컥거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목에 있는 시계를 확인한다. 이치마츠가 온다고 한 시간까지는 10분이 남았다. 그렇지만 원래 있던 장소에서 도망쳐 나왔으니, 이치마츠가 여기까지 제시간에 찾아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네 어깨에 묶은 천을 살짝 풀었다가, 다시 단단히 조인 후 묶었다. 네가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어깨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렀다.
죽어가는 것은 너인데 주마등은 내게 스쳐지나갔다. 어쩌면 네가 죽는 순간이 나라는, '마츠노 쵸로마츠' 란 사람의 인생의 종지부라는 것이라고 느낀 걸지도 모르겠다. 내게 있어 넌 기억의 시작부터 함께한, 분신같은 존재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나는 빠르게 지나가는 주마등 속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으려고 했다. 이 정도로 위험했던 게 처음은 아니야. 다리가 부러진 채로 적진에 숨어있을 때도 있었고, 총알없이 총만 가지고 있던 적도 있었어. 독을 먹고도 너는 살아있었어.
-그렇지만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몰라.
으리으리한 저택이나, 돈더미같은 것은 없어도 좋았다. 마피아 따위가 아니라 어디 굴러다니는 백수였어도 좋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종으로 살더라도 이것보다는 비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종일 시선에 시달린다 하더라도 이것보다는 나은 삶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의, 어느 곳의, 어느 사람이었더라도 나는 행복했을 것이다. 네가 곁에 있기만 한다면.
"..오소마츠."
대답이 없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차올라서 네 얼굴이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소매로 연신 닦아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어떤 반응도 없었다. 제발, 농담이라고 해. 다 나 엿먹이려고 꾸민 거라고. 그게 아니어도 좋으니까 무슨 말이라도 해. 지금 네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사랑스럽게 여길 자신이 있으니까. 연신 바라며 기다렸지만 너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에 손끝이 미친 듯이 경련했다. 사방이 조용했다. 울음을 토하느라 거칠어진 내 숨소리만 들렸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굴러다니던 권총을 집어들었다. 슬라이드를 당기고, 머리를 향하게 한다.
"내가 지금 따라가면, 너 엄청 좋아할 거지. 저승에서도 외롭지는 않겠다고 하면서 되게 좋아할 거잖아."
"..."
"나, 네가 죽은 곳에서 살고 싶지 않아. 너도 내가 그러지 않길 바라잖아. 그렇다고 해, 지금 당장."
"..."
"..-말하라고, 제발..! 죽어달라고, 말해.."
싸늘한 침묵. 나는 그것이 죽음이 다가오는 감각이라는 걸 알았다.
*-*-*
"-일어났어?"
따갑지 않은 정도의 기분 좋은 햇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손길. 반쯤 뜬 눈꺼풀 아래로 흐리게 너가 비쳤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한 느낌의 빨간색 셔츠. 대충 풀어헤친 흰색 넥타이. 어이없을만큼 태평한 어조. 꿈인지, 현실인지가 분간이 안 갈만큼 기억 속과 똑같은 모습. 너는 날 지긋이 바라보다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물었다. "나 안 반가워?"
"지금 일도 미루고 쵸로마츠 옆에 붙어있는 건데."
"-.."
일은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거잖아, 하고 말하려 했는데. 목구멍이 바싹 메말라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너는 기다렸단 듯 옆의 탁자에서 물컵을 들었다. 받아들려는데, 제 입에 갖다댄다. 망할, 이런 데에서까지 리얼리티를 살릴 필요는 없잖아. 꿈이라면 좀 더 괜찮은 애인이 되라고.
그리고 너는 내게 입을 맞췄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간 물이 내 턱에 고였다.
"-이렇게까지, 괜찮은 애인이 되란 소리는 아니었는데.."
"에? 갑자기 재평가? 아, 혹시 병간호해주는 애인한테 설렜다던가. 너 간호사 페티쉬같은 거 있던가?"
"입만 다물면 좋겠네."
너는 씩 웃고는 내 품에 안겼다. 익숙한 체취를 느끼다가, 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문득 꿈 속의 네가 했던 물음이 떠올랐다. '날 충분히 본 거야?' 라고 했었지. 글쎄, 아마 몇 십년을 더 봐도 '충분히' 라는 건 힘들 것 같은데. 그러니까, 만약 현실에 너가 없다면, 그리고 꿈 속의 너가 이 정도로 현실과 닮았다면, 난-,
"평생 이대로가 좋아."
"-응? 뭐가?"
"이대로 꿈 속에서 사는 편이 좋다고."
그렇게 말하고는 네 몸을 부서져라 끌어안았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다가, 품에서 벗어나려는 듯 몸을 비틀었다. 힘겹게 빠져나온 한 쪽 손이 내 얼굴 쪽으로 다가왔다. 뭔가, 힘이 잔뜩 들어간 듯한 게 조금 불안한-,
"악-!"
"꿈? 꿈처럼 느껴져? 그럼 지금은 깼냐? 깨면 어디야, 저승? 아니면 어디? 거기 나도 있어?"
"자, 잠깐. 형..!!"
"죽지 말라고 울길래 이 고생 저 고생 다 해가면서 살아났더니, 나보다 이틀이나 늦게 일어나고 하는 소리가 꿈 타령? 형아 동생 농사 망했다고 울어도 돼?"
손톱으로 아득바득 긁으며 쥐어뜯듯 내 볼을 놓은 네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나는 비명을 삼키며 얼굴을 감쌌다. 볼이 화끈거렸다. 거울을 보면 네가 남긴 손톱 자국이 시뻘겋게 남아있을 것이 분명했다. 내 손바닥 아래에서 욱씬거리며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래서, 꿈 속의 쵸로마츠 씨. 안 아파?"
"그럴 리 없잖아, 아파..!"
"그럼 꿈 아니잖아. 잘 됐네."
너는 대수롭지 않단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도로 내게 안겼다. 나는 방 안을 살폈다. 여전히 지금은 아침이었고, 내가 있는 곳은 내 방이었다. 내 품에 안긴 것도 분명히 너였다. 시계를 확인한다. 10시 18분. 숫자도 문제없이 잘 읽혔다. 내가 무슨 꿈을 꿨었는지도 모두 제대로 기억이 났다. 나는 마지막이다 생각하며 네게 말했다.
"오소마츠."
"왜?"
"내가 너 죽고나서, 다른 사람이랑 놀아나면 어떨 것 같아?"
"동생 농사가 아니라 애인 농사가 망했네." 어이가 없단 목소리로 중얼거린 후에, 어깨에 이마를 붙이며 말한다. 옷감 너머로 네 숨이 닿았다.
"나 죽고나서도 살아있을 거야? 나 너한테 같이 오래 오래 살아달라고 말한 적은 있지만, 혼자 오래 살라는 건 아니었는데? 혼자 외롭게 저승길 가는 거 싫어. 밤마다 꿈에 나타나서 죽어달라고 할 거야. 그니까 쵸로마츠 넌 다른 사람이랑 놀아날 시간이 없-.. 저기, 쵸로마츠?"
나는 네 허리를 끌어당겨 최대한 내쪽으로 붙였다. 배와 배 사이에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도 없도록. 그러고는 네 등에 손을 얹고 지긋이 눌렀다. 빈틈없이 맞닿은 몸에 눌려 숨이 제대로 안 쉬어졌다. 나는 숨쉬는 것을 멈추고 가슴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쿵, 쿵, 작게나마 울림이 퍼지고 있었다. 내 것인지 네 것인지 모를 심장 박동이었다. 아니, 둘 줄 하나라도 멈추면 나머지 하나도 멈출 테니까, 이건 어느 하나라고 특정지을 수 없었다. 이건 너와 내 심장소리였다. 그건 네가 여기에 살아있음을 뜻한다. 나는 그제서야 비로서 긴 숨을 뱉을 수 있었다. 머리에서도 긴 문장이 정신사납게 돌아다녔다. -마츠노 오소마츠는 죽지 않았어. 여기에 살아있어. 숨을 쉬면서,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내 품 안에. 죽지 않았어.
왜냐면 내가 여기 살아있으니까.
너는 내게 꿈이 아니라고 했지만, 난 꿈이어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꿈이니, 현실이니 하는 것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에는 네가 있을 것이다. 욕심이 아주 많아서, 저승길에도 애인 멱살을 쥐고가야 하는 네가.
나보다 높은 네 체온이 느릿하게 나를 물들였다. 네 셔츠에는 옅은 담배향기가 배어있다. 손끝으로 네 몸의 가장자리들을 더듬었다. 현실같은 꿈, 꿈같은 현실, 둘 중의 어느 것이든 상관없이,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만을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