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ee 2020. 10. 10. 20:29

 

 

오소마츠는 꼬리를 살랑거렸다. 매끄러운 화살표 모양이 허공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약간 위험한 듯 보이는 새빨간 루비같은 눈이 한없이 흰 자태를 눈에 담았다. 쵸로마츠는 당황한 듯 발을 뒤쪽으로 움직였다. 찰랑, 하고 가벼운 소리를 내는 물이 차가웠다. 계획이 서서히 비틀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건 윤리에 어긋나는.."
"아."
"..하?"

"여신님, 난 지루한 건 싫어." 추욱 몸을 늘어트리고 조르듯 말하는 어조. 어린아이가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부모에게 매달리는 듯한 어조. 쵸로마츠는 마음 깊숙히서 물밀듯 밀려오는 새까만 감정에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는 이런 지루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자신이 이야기꾼 재주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이 악마가 얼마나 집중력이 없는지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안은 듣기 싫다고 해서 입 다물 수 있는 것도, 고민하기 싫다고 해서 머리속에서 치워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름아닌 이 앞에 있는 악마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쵸로마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요약하자면,"

"여신으로서 널 사랑하는 건 무리야."
"그래서 가달라고?"
"..그래."

악마의 두 눈이 가늘게 늘어진다. 입가의 웃음이 짙어지는 걸 본 쵸로마츠가 두 눈을 질끈 감아내렸다. 아, 대체 이 새끼는 왜 이러는 거야. 악마란 본디 인간을 갖고 노는 것들이 아닌가. 얘는 왜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냐고. 쵸로마츠는 자신이 오소마츠가 쥔 줄에 꿰여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림을 상상했다. 그리 멋진 그림은 아닐 것이다. 깔끔하게 한 번 꿰여 있으면 모를까, 수십 번은 꿰여서 이리저리 줄이 꼬여있을 테니까. 그는 그랬다. 늘 그런 식이었다. 쵸로마츠가 아무리 전력으로 막아본들 늘 사랑에 빠지게 했다.

오소마츠는 잔디가 돋은 들판 위에 털썩 주저앉은 채 고개를 쭈욱 뺐다. 손가락 하나만큼도 안 되는 거리 사이에 두 시선이 마주한다.

"여신님이 거짓말 해도 돼?"
"..."
"아아-, 물론 가달라면 가줄수도 있어. 그런데 여신님. 괜찮겠어?"

쵸로마츠는 답하지 못했다. 괜찮다는 말도 가지 말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물살에 흔들리는 옷자락을 괜히 발로 휘적거려보며 죄악감이 차오른 마음을 환기시키려 노력했다. 검은 날개가 따분히 파닥였다. 오소마츠는 그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았다. 제 처지를 걱정할 뿐만 아니라, 오소마츠 그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눈앞의 여신이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라니까. 딱 그뿐이었다. 쵸로마츠에게 사랑이 고픈 아이처럼 늘 애정을 갈구했다. 인간의 욕망을, 더한 욕심을 바라듯 그의 사랑을 바랐다. 더 많은 애정을, 더 많은 관심을, 더 많은 집착을. 뒷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악마가 앞날을 걱정한다는 것도 되게 웃기지 않아? 우리, 꼴리는 대로 사는 게 천성인 새끼들이라고.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윤리니 뭐니 하는 변명으로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겠다는 그가 괘씸하기도 하고. 오소마츠는 어쩌면 쵸로마츠가 다시는 그런 말을 할 생각도 못할만큼 제게 빠져들지 따위를 고민하며 웃었다. 선량한 두 눈에 들어차는 저 깊은 감정이 미치도록 좋다. 그저, 그저.

"여신님, 난 당신한테 사랑받는 게 좋아."
"..."
"여신님도 날 사랑하는 게 좋잖아. 나 사랑하잖아?"

"그러니까, 그런 소리는 안 하는 게 좋을걸. 나 삐질지도 몰라." 잔디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는 고개를 쭈욱 내밀고 짓궂은 웃음을 해보이는 악마에 여신이 혀를 찼다. 살며시 입술을 맞붙인다. 따끔거리며 저를 파고드는 마기를 버릇처럼 정화시킨다. 공방같은 키스 후에는 만족한 듯 배부른 미소를 지은 악마가 있었다. 신성력에 발갛게 물든 입술이 아슬아슬하다. 몇 번 더 했다간 피딱지가 붙을 기세였다. 그래도 좋다고 웃는 오소마츠 때문에, 쵸로마츠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


"..이대로는, 타락해버릴지도."
"응?"

누구. 설마 여신님? 오소마츠는 재미난 유머라도 들었단 듯 한바탕 웃었다. 까르르 아이처럼 웃는 그 얼굴을 조금 부르퉁한 표정을 한 채 바라보던 여신이 말했다. "웃지 마, 웃을 일 아니니까." 제법 진지한 말투를 쓰는 쵸로마츠에, 오소마츠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째서?"

"여신님 지금 신성력 만땅이잖? 맨날 넘치고. 타락할 여지가 없다고?"
"..너, 요즘 이쪽 오는 게 줄었네."
"에, 그런 거 신경쓰고 있었어?"

"앞으로는 조금 더 자주 올까?" 어딘지 어색한 미소 뒤에 숨겨져있는 생각이 뻔하다.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하고 있겠지. 애당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여긴 제 구역이었고, 그렇기에 이곳에 이상이 생긴 걸 안 천사들은 가장 먼저 제게 묻고는 했으니까.

'쵸로마츠님, 요즘에 이 근방에 악마가 올라오지는 않나요?'

쵸로마츠는 그 질문을 듣자마자 표정을 관리했다. 태연자약하게 아니라고, 못 봤다고 말하며 넘겼다. 본성이 선한 이들답게 그들은 자신이 거짓을 말하는 줄 의심도 안 하고 수긍했다. 허나 여신조차 모르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판정한 듯 그들은 그후로도 며칠 간 이 주위를 돌았다. 오소마츠는 그 눈들을 교묘히 피해가며 쵸로마츠에게 왔지만, 그것에도 한계는 있는 법이었다. 쵸로마츠는 눈을 내리깔고 피부로 전해오는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오소마츠가 곁에 있을 때면 늘 느껴지던 감각, 불안정함이, 오소마츠의 마력이 희미했다. 질리도록 쵸로마츠와 붙어있던 탓이었다. 오소마츠는 쵸로마츠와 처음 만난 그날부터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대악마라 하나 여신의 신성력에 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소마츠는 조금씩 정화되고 있었다. 악마에게 정화는 독이다. 그러니까. 그는 쵸로마츠를 만난 그 날부터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쵸로마츠는 곁눈질로 오소마츠의 손목, 목덜미를 살폈다. 셔츠자락 너머로 보이는 피부가 보라색 멍에 뒤덮여있었다. 천사들이 이 주변을 순찰하기 시작한 이후 언제부턴가 생기기 시작한 멍. 어디선가 들켜서 생긴 상처일 터였다. 아마 저 옷을 벗겨보면 분명히 더 나올테지. 쵸로마츠는 입 속을 여린 살을 짓물었다.

"아니, 됐어."
"왜? 안 괜찮으면서~. 화났어? 앞으로 더 자주 올게. 응?"
"됐다니까, 네 몸 간수나 잘해."

속에서부터 새까만 무언가가 치고 올라온다. 쵸로마츠는 울컥하고 올라오는 그것을 겨우 삼켜냈다.



*


"한 달만이네 여신님, 잘 지냈어?"

쵸로마츠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아봤다. 등 뒤에서 늘 그랬듯 개구진 미소를 지은 오소마츠가 있었지만, 악마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다. 공기 중에 미세하게 섞여든 마력이 손가락 한 번 까닥 하면 사라질 듯 옅었다. 쵸로마츠는 차마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오소마츠 또한 평소와 달리 몇 발자국 떨어져, 웃음을 천천히 지워나가며 쵸로마츠를 바라봤다. 쵸로마츠는 제 힘을 죽이고 죽여, 속삭이듯 말을 흩뿌렸다.

"-오소마츠."
"응."

겨우 이름 네 글자이지만 알았다. 쵸로마츠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숨기는 기색 없이 오롯이 다 담아냈기에 알 수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그 감정이 전해져왔다. 걱정. 서운함. 미안함. 사랑. 마지막, 낭패. 쵸로마츠에게든, 오소마츠에게든 이것은 낭패였다. 오소마츠는 슬그머니 뒤로 숨겨둔 팔을 움켜쥐었다. 

지난 한 달 간, 오소마츠는 여신이 사는 곳에 다가섰다는 이유만으로 천사들에게 한 달 동안 구속당했다. 신성력이 가득 담긴 사슬에 온 몸이 칭칭 둘러져서, 30일이란 시간 동안 발악해가며 천사소굴 속에서 가둬졌다. 사슬에 닿을 때마다 쓰리게 아파오는 감각보다도 속이 타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오늘도 가지 못했는데, 여신님 나 걱정돼서 우는 거 아냐? 하고. 돌아가면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오니 생각해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달만에 찾은 연못의 공기는 금방이라도 깔려 죽을 듯 무거웠고, 제 연인은 호수 속에서 메말라 죽는 법을 배운 것 같았다. 오소마츠는 미리 생각해둔 농담이나 이야깃거리 대신 다른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로 자주 온다했는데, 너무 늦게 와서 미안."
"..."
"가서 못 안아주는 것도 미안. 그게 말이야, 여신님 너무 강해서 다가가면 죽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불가항력이거든."

온갖 변명을 쏟아내는 오소마츠에 쵸로마츠가 울음을 삼켰다. 소리는 죽였으나 차마 막지 못한 눈물이 고이고 고여 볼을 타고 흐른다. 강물에 일그러진 구형을 한 채 떨어져 내리는 눈물방울들을 본 오소마츠가 탄식했다. 너무하잖아, 지금은 가서 가까이 가지도 못 하는데, 그렇게 슬프게 울면 어떡해.

"울지 마 여신님. 조금 쉬다가, 나아지면 바로 안아줄게. 응?"

쵸로마츠는 고개를 약하게 저으며 부정의 의사를 나타냈다. 오소마츠는 차마 숨도 제대로 못 뱉는 그의 목소리 대신 일전의 기억을 회상했다. '네 몸 간수나 잘해.' 하고, 퉁명스럽게 받아치는 목소리. 그때부터 이런 일은 걱정한 거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대로 움직여줄 마음 따위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무시한 거지. 오소마츠는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았다. 악마에게 있어 여신의 샘은 요양하기에 좋은 곳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떠나지 않고, 그 앞에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할 뿐이었다.



*


옷으로 감춰지지 않던 사슬자국을 떠올린다. 마음 속에 들어차는 검은 감정이 깊고 깊다. 끔찍하다. 여신으로서는 품을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가득 메워온다. 쵸로마츠는 꾸욱 가슴께를 붙잡았다. 몸 속에 시커멓고 끈적한 것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선하고 선한, 자신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날개달린 이들에 대한 증오. 또, 이 모든 것이 여신과 악마로서 둘이 한 세계에 태어나 만났기 때문이라는 것에 대한 절망.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것을 신이 내린 시련이라 부른다면, 그는 신이 미웠다. 미울 뿐만이 아니라 혐오스러웠다. 전부 당신의 탓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도, 그가 그토록 아픈 것도.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된 것을 당신만은 아쉬워하지 마시길. 쵸로마츠는 언젠가 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던 도끼를 손에 쥐었다.



*


오소마츠는 한껏 들뜬 발걸음을 옮겼다. 힘은 있는대로 다 날아가버렸고, 이젠 어디 굴러다니는 하급악마에게도 시비를 못 걸 판이었지만 여전히 기분은 좋았다. 이러다가 천사를 만나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만 뒷일 따위가 언제부터 내 알 바이던가. 오소마츠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렇기에 기분이 좋았고, 그렇기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붉은 피로 물든 잔디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오소마츠는 자신이 있던 마계에서나 볼 법한 그 붉은색에 기척을 숨기는 것도 잊고 그대로 수풀을 헤쳐 쵸로마츠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제 존재를 알아챈 천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올 거라는 생각이 중간에 들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언제나 사방에서 자신을 아프게 자극해오던 신성력이 숲 전체에 부재했다. 설마 여신님, 어떻게 돼버렸다던가. 싸늘하게 잔디 위에, 붉은 꽃을 흩뿌린 채 늘어져있는 쵸로마츠를 상상한 오소마츠가 숨을 멈췄다. 설마, 설마, 설마.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면서도 걱정을 떨칠 수가 없다. 두려움에 오소마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거, 싫어. 사라지지 마. 지금 죽어도 괜찮으니까, 당장 와서 안아줘. 제발.

"-오소마츠?"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오소마츠는 막연한 공포 속에서 깨어나 고개를 퍼뜩 처들었다. 눈 앞에는 그토록 바랐던 얼굴이 있는데도, 몸을 아프게 찌르던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제서야 오소마츠는 천천히 쵸로마츠의 행색을 살폈다. 늘상 희던 옷자락이 검게 물들여져있다. 푸르른 생기가 넘치던 월계관은 가시가 돋아난 채 마르고 비틀어져 있다. 손에 들린 도끼에서 뚝, 뚝, 떨어져내리는 피에 오소마츠는 가만히 쵸로마츠를 올려다보았다. 마주본 눈에 짙은 감정이 담겨있다. 만족이다. 더할 나위 없는 해방감을 맞이한 눈.

"여신님."
"..말했잖아. 여신으로서 널 사랑하는 건 무리라고. 그런데도 사랑해달라고 떼를 쓰니까.."

"이제 여신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텐데." 희미하게 웃어보이는 얼굴에 오소마츠는 멍하니 잠겨있던 의식을 수면 밖으로 건져올렸다. 손을 뻗어 피에 젖은 팔을 잡아본다. 아프게 자신을 찔러오던 신성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속이 복잡해서 터질 것 같았다. 채 하나를 들어 자잘한 생각들을 전부 걸러내고, 가장 크고 간절한 생각을 목 너머로 뱉는다.

"그럼 나 이제 사랑해줄 수 있어?"
"그러지 못하면 이 짓까지 한 이유가 없잖아, 멍청아."

오소마츠는 단숨에 쵸로마츠를 끌어안았다. 그가 자신 때문에 타락했다는 죄책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원래 그런 악마였다. 사랑하는 여신님이 타락을 하든, 자신에게 집착하든, 속박하려 들든 상관없었다. 그는 오직 연인의 더 많은 사랑만을 바랐다. 그것을 이룬 지금 오소마츠는 일종의 환희마저 느끼고 있었다. 땅에 채 스며들지 못하고 고인 천사들의 피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피로 뒤덮인 그곳에서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렇게 여신과 악마의 아픈 고민은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