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쌍둥이/쵸로오소

죽음이 두드리는 밤.

Liee 2020. 10. 2. 11:49

 


1. -쿵, 쾅!

"또 시작이네 저거." 질렸단 듯 중얼거린 오소마츠가 근처에 있던 권총을 집어 들었다. 벌써부터 매캐한 화약 향이 나는 듯 했다. 구멍 뚫린 커튼 새로 엿보자, 어쩌다 냄새를 맽았는지 문 앞에 선 흉측한 몸체가 문에 몸을 부딪히고 있었다. 졸린 눈을 애써 부릅뜨며 신중히 조준하고, 쏜다.

-탕.

아. 그제야 오소마츠는 주머니 속의 소음기를 떠올리고 작게 탄식했다. 어두운 밤중에 귀밝은 그것들이 이 소리를 놓칠 리 없다. "시발, 좆됐다.." 작게 속삭이고는 옆에 굴러다니던 쥬시마츠의 배트를 집어 든다. 그래. 오늘도-,

오늘도, 죽음이 두드려오는 밤이다.



2. "이제 슬슬 이사해야겠네,

-냄새가 배었나봐."
"거짓말이지, 벌써?"

질렸단 듯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는 토도마츠에, 쥬시마츠가 데구륵 몸을 굴려 그의 품에 안겼다. 역겨운 냄새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달콤한 체향이 밀려오자, 그제서야 토도마츠는 굳은 얼굴을 펴고 짐을 챙겼다. 애당초 푼 짐이 별로 없으니, 이사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저 살금살금 소리죽여 징그럽고 불쾌한 그 길을 지나야 한단 것이, 그들을 빡치게 하는 이유였다. 다들 신경이 곤두선 마당에, 맑은 눈을 빛내는 것은 쵸로마츠 뿐이다. 피곤에 찌든 오소마츠는 삼남이 저를 바라보는 줄도 모르곤 몸을 일으켰다. 손에는 익숙한 주머니칼이 들려있다. 쵸로마츠는 늘 그랬듯, 오소마츠의 가방을 챙겼다. 안에 든 것이라고는 칼 두 자루와 권총 하나가 전부다.



3. '그것'이 생겨난 지는 얼마 안 되었다. 문제는 마츠노가가 인구가 더럽게 많은 도쿄에 자리 잡고 있었단 점이다. 학자들이 이름을 붙일 새도 없이 그것들은 불과 4일 만에 도쿄를 점령했다. 헤지고 썩은 인육 냄새와 사람들의 비명, 돌아오지 않는 부모님의 부재-. 그 모든 것들 속에서도 아직껏 미련을 버리지 못한 동생들의 얼굴을 장남이 차례차례 쥐어패자, 차남부터 시작해 하나 둘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그것이 도쿄를 점령한 지 5일 째에, 그 집을 나왔다.

오소마츠는 늘 선두였다. 손에 잡힌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야구배트, 의자, 파이프부터 한낱 젓가락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흉기였고, 그의 뒤에 선 이상은 안전했다. 그렇기에 그가 선두였고, 그가 보초를 섰으며, 그가 식량 조달을 해왔고, 언제나의 이사도 그가 늘-..

다시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멀쩡히 걸어 다녔는지부터가 궁금하다. 총을 들지 않는 날이 드물고, 잠을 자는 날이 희박한 그 생활 속에서 그가 어떻게 그리도 멀쩡히 있을 수 있었는지. 혹은, 어떻게 그리 멀쩡한 척한 것인지. 뭐, 이제 와서는 당사자에게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괜한 궁금증이다.

결코 손댈 일이 없으리라 믿었던 권총의 당김새에 손가락을 건 쵸로마츠가 수많은 질문을 씁쓸히 집어삼켰다.

형은 죽었다.

되새기고 되뇌지 않으면 까먹고 이름이라도 불러버릴까, 수없이 외운 말인지라 익숙했다. 슬프지도 않았다. 몇 번째인지 모를 집을 나서며 오소마츠의 물건을 하나둘씩 두고 나올 때도 울지 않았다. 형이라면 이러길 원했겠지, 하며 담담히 버려냈다. 쓸모없는 짐은 사치다. 이제 손은 10개뿐이니까.

제 두 손을 내려다보던 쵸로마츠가 한숨을 내리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형은 죽었다. 형은 죽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그는 죽었다.

-정말 죽었을까?
"닥쳐."

갈 데까지 갔다. 라고 생각하며, 환청이 가득한 귀를 틀어막았다.



4. 그리고, 그는 죽지 않았다.



5. 오소마츠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그 자신은 결코 죽지 않으리란 신념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 비웃어도, 사실이기에 부술 수 없는 신념이 있었다.

동굴 속에 갇혀 수백 일을 굶어도, 폭우 속 강물에 빠져 휩쓸려가도, 우주 속에 산소 없이 버려져도, 폭발에 휩쓸려도, 시속 n km/s로 날아가 콘크리트에 박히더라도, 그는, 살아 있었다.

죽음이란 하룻밤의 꿈과 같은 것. 늘 그랬듯 그에게는 다음의 일상 속 아침이 있었다. 죽음이 아무리 두드려대도, 그에게로 향하는 문은 결코 열리지 않았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예상대로 될 것이었다. 지금 눈을 감으면, 내일은 언제나와 다름없는 일상 속 아침이 있을 것이었다. 곁에는 동생들이 있고, 어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는, 일상 속의 아침. 그렇게 생각하고, 오소마츠는 간만의 단잠에 빠져들었다.

과연,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마츠요나 부드러운 이불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가 눈을 뜬 곳은 더위가 작렬하는 6월 중순의 도로 위였다. 온몸에는 이빨 자국의 흉터가 가득했다.

눈을 뜬 오소마츠는 더듬더듬 몸을 만져보다가 깨달았다. 몸이 마냥 둔했다. 힘껏 꼬집어야 앗, 하고 놀라 힘을 풀 정도로 통각이 둔했다. 그리고 뜨거웠다. 그래, 날짜를 세어보면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더위였다. 오소마츠는 직감했다. 자신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증명하듯 지나치다 만난 그 어떤 사체도 제게 달려들지 않았다. 낮에는 식충식물처럼, 생체반응을 기다리며 널브러져 있는 그것들이었다. 약간의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달려들었었는데, 이제 그것들은 자신이 발로 차 대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이 기다리던 인간의 향이.

그는 시험 삼아 편의점의 삼각김밥 포장을 뜯어냈다. 썩었는지 잔뜩 역겨운 향을 내기에 버렸다. 그 후에 시도한 모든 음식이 다 그랬다. 설마, 전부 다 썩진 않았겠지 싶어 하나둘 뜯어보던 오소마츠는 곧 얼굴을 싸하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음식은 애초에 썩은 적이 없었다. 그의 뇌가 음식의 냄새를 잘못 인식한 것이다. 뜯은 것 중 상당수는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았으며, 보기에도 멀쩡했다. 질끈 눈을 감고 입에 처넣자, 처넣었던 모양 그대로 뱉어냈다. 뱉어냈다기보단, 뱉어진 거지. 도무지 씹어 삼킬 수 없는 냄새와 맛이었다.

오소마츠는 그것이 되지 않았다. 사람을 보고 달려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공격당해서 도망쳤다.-, 몸이 썩어들지도 않았다. 머리도 멍청한 그것들과 달리 잘 돌아갔으나, 한 가지 문제라면, 그래. 그는 불안했다.

누가 보아도, 온몸에 이빨 자국이 박힌 그는 썩어들기 직전의 그것의 모양이었다.



6. 음식을 인지하는 기관이 어떻게 돼버렸다면, 인간적으로 식욕도 함께 없어지는 것이 맞지 않나? 물론 그런 생물학적 방면의 지식이라고는 모래 한 톨만큼도 없던 오소마츠는 목 끝까지 차오른 불평을 삼켜냈다. 애초에 들어줄 사람도 없고. 이제는 거의 익숙해진 맛의 고깃덩어리를 넘긴다. 음식 본연의 냄새와 맛이 역겹다면, 무슨 감각으로든 미각을 덮어버리면 그만이지. 맵기로 이름을 날린 컵누들 회사에서 만든 핫바를 먹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처음에야 생수통에 머리를 처박고 싶을 정도로 혀가 아팠지만, 매일 몇 개씩 억지로라도 먹어선지 지금에 와서는 큰 감흥이 없다. 어쩌면 혀가 마비된 걸지도 몰라. 키득키득 웃으며 컵누들이 가득 담긴 봉투에 핫바 하나를 끼워 넣는다. 매워서 먹지도 못하겠지만, 재미 삼아, 겸사겸사.

저 없이도 잘 살아가는 동생들에게 식량을 조달해주기 시작한 건 우연이었다. 그들이 도쿄로 돌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 건물 사이를 뛰던 오소마츠가 서둘러 몸을 감추고 지켜보니, 그들은 이전보다 더 늘어난 짐을 들고 제법 튼튼해 보이는 집의 문을 따고 있었다. 하필이면, 오소마츠, 그의 집이었다. 문 하나 열어보겠다고 망치를 가지고 설치는 차남을 보다못한 그가 빗물받이 위에 집 열쇠를 슬그머니 올려두었다. 눈썰미 좋은 토도마츠는 금방 발견했다. 언제부터 이게 여기있었냐, 며 의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글쎄. 누가 예상하겠어? 그 시체 무더기 사이에서 형이 살아나왔을 거라고. 오소마츠는 별 걱정 없이 다른 집을 찾아 나섰다. 그는 잃은 집이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그 근방에 집이 하나인 것도 아니고, 고르고 고른 집에 제 동생들이 살겠다는데 쫓아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7. 겨우 들어선 집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 그럴 리 없다며 쵸로마츠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둘러본 다른 형제들의 얼굴 역시 저마냥 심상찮았기에, 그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오소마츠 형일까?"

오남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산타가 오소마츠를 선물해주리라 믿고 밤을 새우는 이였다. 쵸로마츠는 오래간만에 듣는 그 이름에 겨우, 비명을 삼켜내었다.

집은 좋았다. 넓기도 하지만, 방이 착실히 나뉘어 6개나 되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만약 화폐가 통하던 시절이었다면 꽤 비싼 매물이었을 테다. 다섯 명이 하나씩 들어가도 하나가 남았다. 물론 쥬시마츠의 눈에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오지 않는 주인의 방을 남겨두고, 제 방으로 들어간 쵸로마츠는 어색히 방을 둘러봤다. 그것이 없었을 적에도 가져보지 못하던 방을 지금에서야 가지니 심정이 묘했다. 얼마 안 되는 짐을 풀어놓고 침대 시트에 걸터앉았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도쿄로 돌아오자고 말한 것은 가장 밑의 동생 둘이었다. 그것이 생겨나고 나서, 부쩍 쥬시마츠에게 크게 의지하던 토도마츠가 쥬시마츠의 편을 들어준 탓이었다. 쥬시마츠는 오소마츠가 그곳에 있을 것이라며 돌아가자고 외쳤다. 전혀 근거없는 목소리였고, 이유를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물었다. "지금 도쿄로 가는검까?" "집은 이쪽 방향이야?" "카라마츠 형아-, 도쿄로 가고 있는 거 맞슴까?" 지난 몇 달간의 질린 도쿄 노래에, 결국 육둥이는 내려가던 것을 멈추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가면 갈수록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귀향길에 올라선 이후로 눈에 띄게 밝아진 형제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는 또 얼마나 있게 될까. 늘 그랬듯 이번 집도 3개월 안에 비우게 될 것이었다. 도쿄는 그것이 많을 테니 어쩌면 더 일찍-.. 그것이 많은 만큼 신중히 움직여야 할 터였다. 늘 모자란 것 없이 동생들을 챙기려 노력했으나, 여기에 와서는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지방에서부터 옷이니 식량이니 챙겨온 게 많았다. 가져온 즉석조리식품이 몇 개인지 세어보던 쵸로마츠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뒤로 몸을 뉘였다. 막상 세어보니, 많다고 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다.

그리고, 쵸로마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두근거리는 심장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경련할 듯, 힘이 들어간 손가락으로 시트를 쥐어 얼굴 앞에 가져다 댄다. 몰라볼 수가 없는 향이었다.

도대체, 왜, 어떻게, 이 생면부지의 집에서 그의 향이 나는지-,

-죽지 않은 거 아냐?

몇 달 전을 마지막으로 줄곧 부재중이던 환청이 들려오자, 뭐라 대꾸도 못 한 채 쵸로마츠는 무너져 내렸다.



8. "오소마츠 형인 걸까?"
"글쎄 형-.. 아, 핫바다!"

봉투 속에서 핫바를 찾아낸 토도마츠가 화색을 더하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런 불량식품 같은 음식을 얼마 만에 접하는지. 늘 오랫동안 가지고 다닐, 고열량의 음식만을 챙겨 다니다 보니 이런 음식은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더불어 오는 길의 편의점에서는 죄다 없어져 있는 통에 정말 그리웠던 음식이기도 했다. 신난 얼굴로 포장을 까던 토도마츠가 반갑게 핫바를 손에 쥐다 말고, 움찔 굳어 멈췄다.

"토도마츠?"
"..이거 사람 먹을게 못 되잖아!! 진짜, 완전 오소마츠 형 같네!"

코를 찌르는 매운 냄새부터가 사람 음식이 아니다. 이걸 누구한테 먹이나- 고민하던 와중에 카라마츠가 눈에 들어오자, 토도마츠는 그의 멱살을 잡아 세우고는 당황에 벌어진 입에 무작정 집어넣었다. 처음에는 맛있단 듯 우물거리던 입이 점점 느려지더니, 그대로 멈춘다.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원망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토도맟..!"
"아하하, 물 가져다줄게 카라마츠 형! 기다려 봐~!"

"기껏 받은 핫바를 버리면 아깝잖아~! 뱉지 말고 기다려야 해!" 사형선고라도 받았단 듯 시퍼레진 얼굴을 한 카라마츠를 내버려 둔 채, 토도마츠는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옆에서 쥬시마츠가 힘껏 손부채질을 하며 돕는 소리와, "그렇게 하면 더 매운데.." 라고 말하며 옆을 스쳐 지나가는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풐, 흐-.."
"..에?"

방금, 그거-.. 토도마츠가 흔들리는 눈으로 소리가 웃음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주방의 환풍구로서 뚫린 창문이 그곳에 자리했다. 분명 집에 와서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닫아놓았을 텐데, 어째선지 열려있는 상태다. 잘못 들은 거라고, 방금 그게? 착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선명한 소리였다. 멈춰선 토도마츠를 지나쳐 쥬시마츠가 급하게 생수를 통째로 들고 달린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토도마츠가 뒤를 돌아봤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혀에 부채질을,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목구멍에 물을 붓고 있다.

"잠깐, 그렇게 물 낭비하면 안 되거든!!!"

힘껏 소리치면서도 홀린 듯 마음 한구석이 창문 쪽으로 간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그렇게나마 겨우 넘겨낸 토도마츠가 창문을 밀어 잠갔다. 그리고, 다시금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속에 뜬 구름은 새하얬다. 화창한 날이다, 그것들이 모두 드러누워 인간을 기다리는.

토도마츠는 조용히 제가 방금 잠근 잠금쇠를 풀었다.



9. 달빛이 환했다. 쵸로마츠는 제 손에 쥐어진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소음기가 잘 장착됐는지를 확인했다. 오소마츠는 자주 확인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익숙하게 소음기를 확인하는 손에서 신경을 끄고, 누가 달았는지 높이가 제각각인 커튼 사이로 창문 너머를 살폈다. 무언가가 집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쵸로마츠는 당장이라도 장전할 듯 떨리는 손을 바닥으로 향했다. 섣불리 쏘는 것은 금물이다. 이번 집에서는 외출할 일이 적었으니, 살냄새가 배었을 리도 없다. 분명 이대로 지나쳐 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유심히 걸어오는 형체를 살피던 쵸로마츠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손에는 익숙한 검은 비닐봉지를 든, 후드집업을 뒤집어쓴 남자였다. 그러니까, 그것이 아니었다는 소리다. 손에 들린 건 식량이 떨어져 갈 때면 어김없이 문 앞에 놓여있던 비닐봉지가 맞았다.

쵸로마츠는 몸을 숙였다. 늘 얼굴을 보여주지 않던 이였으니, 저가 있단 걸 알면 분명 몸을 감출 것이었다. "지금까지 밤에 남자를 봤다는 녀석은 하나도 없었는데-.." 감춰지지 않는 떨림을 무마시키려는 듯 쵸로마츠가 혼잣말했다. 그래, 그를 봤다는 형제는 아무도 없었다. 왜 저만 그를 보게 된 것인지는 의문이었으나 이것은 기회였다. 식량이 온 아침이면 노래하듯 오소마츠를 찾던 쥬시마츠나, 아닌 듯하면서도 기대를 버리지 못하던 이치마츠와 토도마츠가 그를 보게 됐다면 분명 여기서 뛰쳐나갔을 게 분명했다. 그 꼴이 나기 전에 그의 정체를 알아야만 했다.

그래, 다가오면 바로 문을 열고-.. 조용히 집 안으로 끌어당기면 되는 거야. 정체만 확인하고, 그리고-.. 그러다가 음식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어쩌지? 쵸로마츠가 몸을 바짝 굳혔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이제껏 밖에 나간 적은 손에 꼽았다. 잠깐 전구나, 옷을 가지러 나간 적이 한 두 번 있었을 뿐이었다. 이 집에 머무른 지 몇 달이나 되었으나 집 밖을 나간 것은 한 손으로도 다 헤아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평화로운 것이었다-.

-끼익..

바짝 쳐들리려는 고개를 다급히 붙잡는다. 문이 열렸다. 거짓말. 분명 잘 잠가놨는데, 왜? 어떻게? 문고리를 부수는 소리는 나지 않았는데? 열쇠는 제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곳에, 머무르던..

"..-대박. 얘 지금 자..?"

속삭이듯, 잔잔히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쵸로마츠가 눈을 떴다. 코앞에, 낡은 붉은색 운동화가 있었다. 바로 지척에서,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환청도 없는 이 밤에, 그의 목소리였다. 쵸로마츠는 제 바로 앞에 선 인영의 손을 붙잡았다. 거칠거칠한 흉터가 느껴진다.

"오소마츠 형."

쵸로마츠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분명했다. 어떻게 살아있는지 모르겠으나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제 형이 눈앞에 있다는 것이다. 놀란 듯 주춤하며 뒷걸음질치는 오소마츠를 잡고 단숨에 몸을 일으킨 쵸로마츠가 그를 끌어안았다. 고개를 파묻어서 나는 향은 그가 분명했다. 햇살같은 향에 담배냄새가 조금 섞여든, 어째선지 자신의 침대시트에 배어있던 그 향이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걸 겨우 참아낸다. 안긴 몸은 바짝 굳어 숨조차 들이키지 않는다. 붙잡은 손에 힘을 가하자, 흉이 더 잘 느껴졌다. 뭔가, 특정한 모양이었다. 무슨 모양인가-, 하고 고민하던 와중에, 그가 움직였다.

어깨를 쥐고 잠시 고민하던 눈치더니, 강하게 밀쳐낸다. 얼떨결에 뒤로 몇 걸음 가다못해 넘어지기까지 한 쵸로마츠가 물었다. "형?" 급하게 후드를 뒤집어쓴 터라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 앞에 선 그의 손은, 이빨 자국의 흉터로 가득했다.

"..-오소마츠."
"..."

망연자실히 제 이름을 부르는 쵸로마츠에, 오소마츠는 다급히 집을 박차고 나왔다.



10. "쵸로마츠, 이제 그만 들어가서.."
"봤어, 오소마츠 형."

바닥에 널브러진 권총을 집어 들던 카라마츠가 멈칫, 하고 쵸로마츠를 올려다봤다. 졸린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는 눈동자였다. 피곤이 깃든 눈도 아니었다. 어째선지 슬픔으로 가득한 눈을 한 쵸로마츠를 마주 본 카라마츠가,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권총을 집어 들었다.

"그럴 리 없다."
"오소마츠 형이었다고! 봤다니까. 꿈같은 게 아냐. 여기 집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왔다고!"
"그렇다면 왜 오소마츠는 여기 없는 건가."

-그야, 그가 도망쳤으니까.

이빨자국이 가득한 손으로 주먹을 말아쥐며, 그것들이 일어나 움직이는 밤에 발소리도 안 죽이고 뛰어갔으니까.

그는 말할 수 없었다. 오소마츠가 그것에게 물렸다고. 카라마츠는 한 명의 형보다 4명의 동생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였다. 대답이 없자 그럴 줄 알았단 듯 옅은 한숨과 함께 차남이 입을 열었다.

"그 일 이후로, 동생들이 얼마나 형님을 그리워했는지 알고 있잖아."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그를 그리워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었으니까. 쵸로마츠는 차갑게 식은 카라마츠의 눈을 노려보았다. 한 순간도 지지 않고 맞붙어 온다.

"동생들 앞에서는 그 이야기, 꺼내지 말도록 하지."

쵸로마츠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변했지. 너도.

무리를 이끈단 것은 뜻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의견은 배제해야 하고, 누군가의 의견은 묵살시켜야 한다. 차남이 지난 2년간 차갑게 변한 이유라 한다면 그 뿐이었다. 그는 저만큼 차가워져야 했기 때문에 차가워진 것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온 걸지도 모른다.. 오소마츠를 빼고.

-하지만 이제는 그 놈도 안 죽은 게 되는 거지. 쵸로마츠는 카라마츠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2년이라는 세월 동안 돌보고 다독여서, 동생들은 겨우 다 일으켜 세운 이 시점에 변수가 생기는 것을 반가워할 리 없다. 설령 그게 정말 오소마츠라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면 카라마츠는 무시할 사람이었다. 그는 형 하나보단 동생 넷을 더 아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그러는 이유를 알기에 그를 탓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동생들이 그를 배려하는 착한 심성을 가졌었다면 그는 저렇게 되지도 않았었겠지. 지금껏 카라마츠는 늘 각기 다른 의견들의 절충안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팠고, 쵸로마츠는 늘 그 절충안을 따라주는 편이었다.

그것도 다 옛날 일이겠네. 할 일이 늘어난 제 형을 동정하듯, 쵸로마츠가 쓴 한숨을 내뱉었다.



11. 하얗게 흉진 얼굴을 바라보던 오소마츠가, 무겁게 한숨을 토해냈다. 아침이면 손가락이 모두 잘 움직이는지, 썩어들어간 피부는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죽음이 거세게 두드려오던 그 날이 지난 지 2년이 다 돼가지만 그 많은 아침 중 이상을 발견한 날은 없었다. 하지만 내일은 그런 아침이 올 지도 모르지. 오소마츠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소매를 길게 당겨 최대한 손이 눈에 띄지 않도록 한다. 저번에 도로에서 생존자를 만나 총을 맞고 나서부터는 나가기 전 필수사항이 된 행동들이다.

'오소마츠.'

손을, 잡혔다. 아니, 그것뿐만 아니라 보이기까지 했다. 아마 흉진 제 손을 보았을 거다. 그렇기에 목소리가 그 모양이었겠지. 금방이라도 울 듯한, 비탄에 잠긴 목소리. 그 와중에도 확신이 담겨있던 제 이름-.. 오소마츠는 괜히 머리를 헤집었다. 왜 굳이 집 안에 들어가 봐서는! 그 밤은 실수투성이였다. 그가 자신을 못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실수였다. 피부 위부터 변한 것이 수두룩한데, 또 2년이란 시간이 있었는데, 그 어두운 밤 속에서 목소리만 듣고 알아맞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오소마츠는 분명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자신을 다 잊었을 것이라고. 손목 끝까지 소매를 잡아당긴다.

아, 이게 뭐하는 짓거리야.

잊을 것이라고 믿었다. 2년은 짧은 시간은 아니니까. 괴물이 바닥에 깔린 도시에서 살며 죽은 형을 언제까지 추억할 수 있겠어? 

카라마츠는 바보가 아니다. 오소마츠는 차남이 제 역할을 착실히 다 하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쵸로마츠가 자신을 찾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가능성을 생각할 테니까. 식량과 생필품을 제공하는 미지의 인물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은 큰일이다. 카라마츠는 결코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나 강경하게 나오면, 쵸로마츠도 분명 굽히겠지. 분명-..

오소마츠는 생각을 하다 말고 가방을 챙기던 손을 멈추었다. 뇌가 굳은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는 한 장면만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오소마츠, 오소마츠, 오소마츠. 울음이 가득 찬 목소리. 오소마츠-.. 달빛이 비춘 눈동자는 기이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오소마츠는 그런 눈을 한 삼남이 드물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문득 끼쳐오는 소름에 팔을 쓸어내린다. 이빨 자국이 손끝에 오돌토돌 걸렸다. 혹시, 혹시라도 쵸로마츠가 위험한 짓을 하기라도 하면?

마츠노 쵸로마츠는 아주 가끔 미친 짓을 하는 놈이었다. 오소마츠는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본다. 내가 쵸로마츠한테 잠깐이라도 미친 짓을 하게 할 정도로 중요한 사람인가?

"..아니야."

어깨 위의 불안을 털어내고, 가방을 챙긴다. 버릇처럼 까닥거리는 손가락을 멈추고 문을 열면 집 앞에 가득한 사체의 풍경과 이젠 익숙해진 부패한 살 냄새가 가득했다. 일상의 아침은 2년 전부터 끝나있었다. 다 죽겠는 와중에 나 하나 찾겠다고 그러겠어. 쵸로마츠는 분명 카라마츠의 충고대로 잊을 것이다. 오소마츠, 그만 잊으면 됐다. 어젯밤의 일은 꿈이었노라, 그렇게 여겨버리면 끝날 문제였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츠노 오소마츠는 두려움을 아는 인간이 아니었다. 어제의 도망은 한낱 꿈이었을 뿐이다.



12. "어라? 여기 창문, 안 잠겨있어."
"..정말? 위험하네-. 누가 열어두고 안 잠갔나 봐."
"그치?"

쥬시마츠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네!" 길게 뻗은 손은 걸쇠를 내릴 생각이 없는 듯 그 주변에서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토도마츠가 긴장 어린 시선을 감춘 채 물었다. "왜? 안 잠가져?" 쥬시마츠는 도리질 쳤다. 소매로 감춘 얼굴의 표정을 알 수가 없다.

"있지, 토도마츠."
"..."
"잠그지 말자."

회유하는 목소리. 간절함이 전혀 담기지 않았다. 그야 그렇지. 구태여 애원을 할 필요는 없잖아, 이미 넘어온 사람한테. 토도마츠는 쥬시마츠의 팔을 잡아 창문에서 떨어트려 놓았다. 마냥 기쁜 얼굴로 쥬시마츠가 물었다.

"오소마츠 형일까?"

토도마츠는 제 머릿속에 비명이 울려퍼지는 걸 느꼈다.



13. 기분이 더러워. 이치마츠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피부 위쪽으로 닿는 공기가 싸늘했다. 방 안에 내려앉은 적막은 그토록 무거운 것이었다. 초여름의 옅은 더위 정도는 가볍게 잊게 하는. 이치마츠는 제 위의 형 둘을 곁눈으로 살폈다. 말주변이 없는 자신이 불평할 것은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말이 없었다.

"이치마츠, 오늘이 너 차례던가?"
"으, 응?"
"밤 새는 거."

이치마츠가 속으로 셈을 했다. 어제는 카라마츠가 하지 않았던가? 아, 그치만 원래는 쥬시마츠 차례였다고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역순으로 돌아오는 주니까, 그래. 맞았다. 오늘은 그의 차례였다..

"-오늘도 내가 대신 하도록 하지."

반쯤 가려진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오늘도? 그렇지만 그는 어제도, 어저께도..

"또? 그래놓고 낮에 잘 생각이잖아."

눈살을 찌푸린 쵸로마츠가 종용하듯 이치마츠에게 눈짓했다. 카라마츠가 미소 띤 얼굴로 그 앞을 막아서며 무대 위 주연처럼 말을 읊었다. "여기에 머문 것도 꽤 오래되지 않았나, 브라더-. 형제 간의 멋진 우애를 보이는 거다!" 그러고는 얼핏 상냥한 시선을 하곤 덧붙인다.

"혹시 위험한 게 붙었을 지도 모르니까. 빨리 집을 옮기는 게 좋겠군."

쵸로마츠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치마츠는 온 몸의 피가 차가워지는 듯한 착각에 떨었다. 대화를 따라가진 못해도, 이 분위기가 뭘 의미하는지는 알았다. 누군가 선을 넘었단 것도.

"작작 좀 해..!"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한기,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 새하얗게 얼굴이 질린 이치마츠는 더 못 참고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쌍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자신을 파고드는 감각에 곧바로 후회하면서도, 그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단정 지었다.

"보초는 내가 설 거니까, 쿠소마츠는 들어가 잠이나 자. 뭐,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웅크린 등이 도망치듯 문밖으로 모습을 감추자, 카라마츠는 말없이 쵸로마츠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는 원하는 바를 이뤘단 듯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14. 아무것도 없잖아. 총을 제 옆구리에 단단히 붙든 채로 한참을 창문 밖만 내다보던 이치마츠가 고인 숨을 뱉었다. 낮에 있던 일이 마음에 걸려 졸음도 마다하고 눈을 부릅뜨고 바깥을 살폈건만, 평소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살냄새를 맡고 어기적어기적 다가오는 것들도 없었다. 후들후들, 다 썩어서는 덜렁덜렁 매달린 살점을 제 숨으로 흔들고 있는 그것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저것을 역겨워했던가. 이치마츠는 힘주어 잡고 있던 총을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회상했다. 그게 대체 얼마나 예전 일이지? 그것들이 생겨난 지도 벌써 한 손으로 셈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됐다. 그렇게나 많은 밤을 저 징그러운 숨소리를 자장가 삼으며 보내온 것이다. 아마 이젠 밖에 나가서 혼자 살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생각하고 이치마츠는 키득키득 웃었다. 혼자 살아? 농담이지, 그건 무리야.

밖에서 혼자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삶'을 살지는 못할 것이다. 한평생을 여섯이서 하나라고 서로를 묶어놓으며 살아왔으니까. 하나 빠진 걸로도 이렇게 위태로운데, 어떻게 하나가 혼자 멀쩡하겠어? 다 망가져서 문드러져가는 것도 살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서서히 죽어가는 것뿐이지, 그건.

-그렇기에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치마츠는 지금 제 얼굴이 어딘가의 석고상보다 훨씬 더 새하얗게 질려있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쵸, 쵸로마츠. 차라리 낮에.."
"카라마츠가 낮에는 깨어있을 거라 못 나가. 지금 자고 있잖아."
"그래도 지금은 좀.."

이치마츠는 불안하게 주변을 살폈다. 목소리를 아무리 죽였다지만, 밖에서 소리 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제정신이야? 밤에 나가겠다니! 2년간 가장 잠잠하던 것이 불안하다 싶었다.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몰라 가슴 졸이던 것도 옛날 일인데, 이제 와서 이렇게 터질 줄은! 이치마츠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쵸로마츠가 제게 맡겨뒀던 권총을 내밀었다. 살금살금 땅을 딛고 선 쵸로마츠가 그것을 받아 가방에 챙겼다. 연필심을 갈아 넣은 지퍼가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닫혔다. 문득 이치마츠는 억울함이 치밀어올라 물었다.

"이럴 거면 나한테 왜 보초를 보라고 한 거야?"
"뭐가?"
"카라마츠가 밤에 자서 낮에 못 나간다며. 그럼 밤에 보초를 서게 뒀으면 됐을 거 아냐."

쵸로마츠는 빤히 검은 눈을 살폈다. 이치마츠는 긴장한 채로 그 눈을 마주 보다가, 동공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맥을 탁 놓았다. 제 눈이 아니라, 제 눈에 비친 자신의 뒤를 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의심을 거둘 수 없단 듯 연신.

아니, 기대인가?

"밤에 가야 더 위험하잖아."
"..그게 무슨,"
"그래야지 너희가 날 찾으러 오겠지. 나는 카라마츠한테 동생이니까, 찾으러 올 거야."

머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 날아가서 텅 비어버렸다. 쵸로마츠는 언뜻 초조함이 비치는 얼굴로 덧붙였다.

"그놈이랑 기다릴 테니까, 찾으러 와."



15. 쵸로마츠는 숨을 양껏 들이쉬고는 집을 빠져나왔다. 웬만큼 멀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내뱉지 않을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아주 만약에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오로지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치고도 뻣뻣이 고개를 들 자신은 없었다. 간만에 쐬는 밤공기는 차고 건조했다. 꽃샘추위인가. 쵸로마츠는 두껍게 입고 나온 것이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살냄새를 최대한 가리기 위해서였지만, 눈꺼풀에 밀려드는 한기를 고스란히 감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유용했다. 약속이라도 잡았단 듯 대로변 한가운데 선 쵸로마츠가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곤 살며시 숨을 내쉬었다. 겨우 들이쉰 숨은 차가웠다.

-전부 다 자기가 홀로 믿은 것이었다. 그가 와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쵸로마츠는 찬 바람에 몸을 웅크리며 속으로 짓씹었다. 안 오기만 해봐, 미친 자식. 그가 와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와야 했다. 자신이 그렇게 믿었으니까.

오소마츠는 늘 자신을 애태우는 사람이었다. 콱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얄밉게 굴다가도, 입안의 혀처럼 달게 굴며 해달란 것을 다 해주던 사람. 한 번에 부탁을 들어준 적은 없었지만, 한 번도 제 기대를 저버린 적 없는 사람. 그리고 쵸로마츠는 지금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위험하게 두지 않을 것이란 기대. 그렇기에 오소마츠는 여기에 와야 했다. 아무리 늦더라도 자신이 그 기대를 접기 전에는 와야 했다.

부츠를 소리 나지 않게 달싹이며 쵸로마츠가 지루함을 죽였다. 옆에서는 가지각색으로 그것들이 울고 있었다. 그르릉, 그릉, 거친 숨소리. 거친 아스팔트를 끄는 걸음. 쵸로마츠는 죽음 앞에서 태연해지는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짓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한밤중에 그것들이 가득한 도로에 나가서 서 있어? 미친놈이나 할 짓이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과거가 떠올랐다. 그리 멀지도 않은데,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과거가.



16. "우리 내기할까, 쵸로마츠?"
"이 밤에 무슨 내기야. 도로 앉아."
"왜, 심심하잖아."

오소마츠는 못마땅하단 듯 바닥을 뒹굴었다. 더러우니까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쵸로마츠는 소리치는 대신 둿덜미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왔다. 켁, 켁 하며 다급하게 손을 휘젓는 모습에 손을 가볍게 놓는다. 그대로 머리를 쵸로마츠에게로 기댄 오소마츠가 세모꼴이 된 눈을 하곤 올려다봤다. "형아 죽이려고?"

"내가 형을 어떻게 죽여.. 무슨 내기인데, 그거."
"몰라, 아무튼 내기."
"뭘 걸고?"
"-소원?"

역시, 이 자식이 그냥 이런 제안을 할 리가 없지. 쵸로마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기면 무슨 소원을 빌려고, 대체. 오소마츠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다가, 문을 엄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밖에 다녀오는 건 어때?"

"-밖에? 미쳤냐?"
"아니면 내가 다녀오는 거로."
"안 돼."
"심심하잖아~. 소원권 안 갖고 싶어? 응?"

급기야는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는 오소마츠를 보던 쵸로마츠가 혼란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밖에는 지금 그것들이 두 발 딛고 돌아다니는 중인데, 나가겠다고? 그의 태도가 하도 태평해서, 쵸로마츠는 자신이 잘못된 것인가 싶은 착각마저 들었다. 살살 꾀는 목소리가 조금 나른한 것도 한몫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목소리가 어느 톤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딱 1분. 1분만 나갔다 오는 거야."

-1분이면 별 문제 없지 않을까? 어디 멀리 나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문 앞에 서서 시간만 보낼 텐데.. 쵸로마츠는 여러 번의 합리화 끝에 내기를 하겠다고 말했다. 오소마츠는 자신이 밖에서 1분을 버틸 수 있다, 에 걸었다. 쵸로마츠는 당연히 그 반대였다.

"그럼 갔다 올게."
"멀리 나가는 것도 아닌데 뭘 갔다 올게, 야. 거기 가만히 있어야 해."
"네, 네~."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쵸로마츠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셌다. 1-.. 2-.. 3-.. 심장이 1초에 3번은 뛰는 것 같았다. 너무 느리게 세는 거 아냐? 쵸로마츠는 속도를 높였다. 4-, 5-, 6-, 7-.. 여전히 심장이 1초에 3번은 뛰는 것 같았다. 가슴 위에 손을 올리니, 이때까지 이렇게 빨리 뛴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격하게 뛰고 있었다. 그는 초조하게 숨을 내쉬었다. 별일 없을 거야. 1분이니까. 고작 60초니까. 어느새 숫자는 20에 다 와 가고 있었다. 쵸로마츠는 방금 전의 자신을 원망했다. 왜 이런 내기를 해서는..!

23, 24, 25.. 쵸로마츠는 당장이라도 오소마츠가 문을 열고 돌아오기를 바랐다. 아, 이건 좀 쫄리네. 하면서.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그렇지만 문 너머는 잠잠했다. 무서울 정도로. 34, 36, 37, 39.. 쵸로마츠는 한두 개씩 숫자를 건너뛰어 셌다. 앞에서 좀 빠르게 셌으니까, 이래도 모를 거야. 숫자와 숫자 사이에 틈이 전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숫자를 세고 있으면서도 그는 그렇게 했다. 48, 50, 51, 54, 57-.. 그리고 쵸로마츠는 숨을 멈췄다. 약속한 60초가 지났다. 정확히는 그보다도 한참 못한 시간이.

여전히 문 너머는 잠잠했다. 문을 열어달라고 보내는 신호도 없었다. 그런 걸 맞춰두지 않았으니 올 리 없었지만. 쵸로마츠는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은 감각에, 조심히 문고리를 돌렸다. 아주 작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슬쩍 열린 문틈 사이로 얼굴이 보였다.

"-에? 벌써 1분 지났어?"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손을 붙들고 집 안으로 그를 들인 다음, 자물쇠 4개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잠갔다. 오소마츠가 진정하라며 옆에서 속삭이며 등을 토닥였지만 떨림이 멎질 않았다. 겨우 문을 제대로 잠근 쵸로마츠는 그대로 그를 품에 안고 울었다. 밤이라 소리도 못 내고 물기 어린 숨을 뱉었다. 오소마츠는 드물게 아무 말 없이 그를 마주 안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사과라도 하듯이.



17. 그 이후로 쵸로마츠는 오소마츠가 위험한 짓을 하는 것을 무덤덤하게 여길 때가 많았다. 그때부터였다. 둘씩 돌아가며 하던 보초를 오소마츠가 혼자 하게 된 것은. 다 같이 나가는 게 위험한 것 같다며 혼자 식량조달을 해오겠다고 한 것도 그 이후였다. 쵸로마츠는 소매 안에 밀어 넣어 숨겼던 손끝을 내밀었다. 바람이 찼다. 자신을 지나쳐 걸어가던 그것 하나가 고개를 돌린 것도 같았다. 쵸로마츠는 개의치 않고 생각을 마저 이었다. 그날 오소마츠가 벌인 그 위험한 짓은, 어쩌면 제게 주는 하나의 믿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정도로는 무너지지 않는다고. 끄떡도 안 하는 사람이라고. 날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런 식으로, 하나의 본보기를 보여줘서 믿음을 가지게 하는. 쵸로마츠는 조금 더 손을 길게 뺐다. 만약 진짜 그런 거라면, 심하잖아. 일부러 그러는 거면서 한 마디 상의도 없었단 거지. 내가 지를 걱정할 걸 알면서도, 그게 위험한 건 줄 뻔히 알면서도..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무른 발바닥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아니라, 또 숨죽여 다가오는 사람의 발소리가 아니라, 곧게 다리를 뻗고 숨기는 기색 없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저벅, 저벅, 하고. 쵸로마츠는 고개를 돌렸다. 양껏 눌러쓴 모자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신고 있는 것은 다 낡아빠진 빨간색 운동화였다. 쵸로마츠는 앞에 있는 그것을 밀치고 한달음에 뛰어갔다. 달리기는 자신이 있었다. 가까워진 허리를 끌어안고 목에 얼굴을 묻었다. 제 침대 시트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그 향이 맞았다.

"-오소마츠."

사방에서 살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18. "-그게 무슨.."

카라마츠는 잠에서 깨지 못한 멍한 정신으로 되물었다. 이치마츠는 채 떨림이 다 안 가신 목소리로 대답했다. "갔다고, 쵸로마츠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카라마츠는 블라인드를 걷었다. 여전히 방은 어두웠다. 컴컴한 밤이었다. 옆에서 이치마츠가 횡설수설하는 소리가 났다.

"쵸로마츠는 너가 일어날 때까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러면 안될 것 같아서. 시발, 그렇잖아. 지금 밖에 나가면 그냥 개죽음이라고. 말로는 그놈이랑 같이 있겠다는데-.. 너, 너. 오늘 아침에 쵸로마츠랑 싸웠잖아. 넌 뭔가 아는 게 있어서 그런 거잖아. 대체 그놈이 누구길래 쵸로마츠가 눈이 돌아가선-.."
"오소마츠다."
"..하?"

카라마츠는 차갑게 식은 손끝으로 제 목덜미를 흝었다. 축축했다. 이치마츠는 말도 더 잇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생각도 못한 이름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해, 마음 한켠 깊게 묻은 이름. 카라마츠는 신음을 삼켰다. "오소마츠.."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이 멋대로 그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길이 막힐 때면 늘 부르게 되는 이름이었다. 그토록 원망하면서도 놓을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오소마츠 형, 살아있었어?"
"..."
"살아있었냐고, 카라마츠."

더없이 싸늘한 물음이었다. 카라마츠는 조용히 쓴웃음을 삼켰다. 잘못은 그가 했는데, 미움받는 건 왜 늘 자신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정 안 가는 자식. 카라마츠는 힘없는 손길로 이치마츠의 어깨를 밀어냈다.

"..너.."
"-아침에. 아침에 얘기하도록 하지. 지금 나가봐야 우리도 같이 죽을 뿐이다."

이치마츠는 제 어깨에 닿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고개를 숙여 카라마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목소리는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버겁단 듯이. 이치마츠는 뭔가 잘못됐단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가 이렇게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이치마츠는 먼저 들어가서 자는 게 어떤가, 지금부터는 내가 보초를.."
"됐어."
"..이치마츠."
"아니.. 그, 됐다고. 너나 잠 자. 다 죽어가는 몰골을 해놓고 무슨.."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침대에 억지로 눕혀놓고는 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마음이 심란했다. 카라마츠가 원래 저렇던가? 그러고 보면 요즘따라 지쳐 보이는 것 같긴 했다. 늘 서로 감정을 쏟아내길 바빠서 몰랐지. 서로 살필 생각도 안 하고 살아서. 여유가 없었다. 하는 거라고는 일주일에 한두 번 꼴로 하는 보초와 두, 세 달마다 가는 식량 조달밖에 없는데도 그랬다. 이사나 자원 배분 문제는 모두 카라마츠가 관리하고 있었는데도.

그래서 더 지친 거 아냐? 이치마츠는 안 그래도 부스스한 제 머리카락을 다 헤집어 놓으며 신경질을 냈다. 그러고 보면, 대체 왜 그런 문제들을 카라마츠 혼자 결정하게 둔 거지? 혼자 감당할 문제가 아니었다. 몇 달꼴로 닥쳐오는 문제를 끝없이 해결하고 있으니 지금까지 안 지친 게 더 신기했다. 카라마츠가 혼자 그 일을 하는 2년 동안 어떻게 아무도 거기에 의문을 안 가질 수가 있지..?

그리고 이치마츠는 불현듯 깨달았다. 오소마츠가 하던 일이었다. 그가 죽고 남겨진 일들이었다.



 19. 옆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비닐이 내는 와그작와그작 하는 소리도. 그리고, 옅은 담배 향기. 쵸로마츠는 살짝 고개를 틀었다. 후드를 뒤집어쓰지 않은 옆얼굴에 선명한 이빨 자국이 보였다. 바쁜 손이 이것저것을 커다란 가방에 구겨 담고 있었다.

"오소마츠 형."
"-어, 일어났어?"
"내 가방은?"
"저쪽에."

가리킨 곳을 보니 저가 가져온 가방이 그대로 벽에 기대 놓여있었다. 쵸로마츠는 졸음이 다 안 가신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다가섰다. 지퍼를 열고 안을 뒤지고 있자니 뒤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어쩐지 안도하는 것 같은 느낌.

"뭐야. 너 형아 찾으려고 나온 줄 알았는데, 그냥 가출한 거였어?"
"가출할 이유가 어디 있어서 내가 집을 나와. 너 데리러 온 거 맞아."

쵸로마츠는 손에 찾던 것이 쥐이는 감촉을 느꼈다. 찾기 쉽게 입구 가까이에 놓아서 다행이었다. 뒤에서 그가 중얼거렸다. "데리러 왔다고.." 쵸로마츠는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철컥,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작게 울려 퍼졌다. 오소마츠는 불현듯 우연히 생존자에게 총을 맞았던 그 날을 떠올렸다. 맞은 당시에도 그리 아프지 않다고 여겼던 그 부분이 갑자기 아팠다. 시리게 욱신거렸다. 오소마츠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조용히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형아 죽이려고?"

쵸로마츠는 오소마츠를 돌아봤다. 도망갈 의지가 없단 듯 앉은 자리에서 미동도 없었다. 언젠가 들었던 물음. 쵸로마츠는 총구가 아래를 향하도록 겨눴다.

"내가 형을 어떻게 죽여."



20. 그들이 왔을 때는 다 끝나 있었다. 오소마츠의 물건으로 보이는 것들이 가방에 차곡차곡 담겨 정리되어 있고, 그 주인은 다리에 두껍게 붕대를 두르고는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었다. 쵸로마츠는 침대의 머리맡에 서서, 손에 든 무언가를 굴리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단번에 그것이 권총 안에 있던 탄피임을 알아보았다. 또한 그게 어디 박혀있었던 것인지도 알 것 같았다.

"총을 쏠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쵸로마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 달싹 붙어있던 쥬시마츠가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카라마츠 형!"
"무슨 일인가, 쥬시마츠?"
"오소마츠 형아, 집에 데려갈 거지?"

카라마츠는 순간 제게로 모든 관심이 쏠리는 것을 느꼈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느낌. 카라마츠는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그를 살폈다. 곳곳에 박힌 이빨자국을 제외하면 그는 평범해 보였다. 대답이 늦어지자 쥬시마츠가 불안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응? 그럴 거지?" 쵸로마츠가 손톱으로 딱, 딱, 소리를 내며 탄피를 두드리고 있었다. 깊게 잠든 오소마츠의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창백한 공기에 물든 듯, 손끝이 차가웠다.

"-데려갈 거야."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손등에 옅게 파인 이빨자국을 손끝으로 흝던 이치마츠가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왜, 어차피 그렇게 말하려고 했잖아.." 한참이나 말이 없던 토도마츠는 그제야 웃으며 입을 열었다. "결정된 거네, 그럼!"

"오소마츠 형 기절시킨 건 쵸로마츠 형이니까, 형이 업고 와. 나머지 짐은 카라마츠 형이 다 들고.."
"자, 잠깐..! 왜 내가-?!"
"그치만 나,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돌아다니니까 어지러운걸~."
"가방 하나는 들어줄게! 나 힘세니까-!"
"쿠소마츠 도와주면 부정 타, 쥬시마츠."

이치마츠가 키득키득 웃으며 먹을 것이 든 가방을 카라마츠에게로 떠밀었다. 카라마츠는 잠자코 그것을 내려보다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에 단단히 멨다.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21. 햇빛이 따가웠다. 블라인드를 안 내리고 잤던가? 노을이 질 때쯤인지 눈꺼풀을 파고드는 빛이 붉었다. 어쩐지 좀 몸이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 일어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가방은 내일 전해주면 되겠지. 오소마츠는 몸을 일으키는 대신 힘아리 없는 팔로 벽면을 더듬더듬 쓸고 올라갔다. 여기, 이쯤에 블라인드 손잡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눈부셔?"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드르륵 하고, 블라인드가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오소마츠는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블라인드에 가리어 길게 그림자가 진 얼굴이 태연자약한 표정을 하고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이 덜 깼나? 쵸로마츠는 어딘가 넋이 나간 듯한 오소마츠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며 생각했다. 하기야 어젯밤에 좀 많이 피곤하긴 했지. 사방에서 달려들던 그것들로부터 도망치는 것만도 힘든 일인데, 날 어깨에 들쳐메고 달리기까지 했으니까-.. 쵸로마츠는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제 형의 눈가를 살살 쓰다듬듯 매만졌다. "자려면 더 자."

"..저기, 쵸로마츠."
"왜?"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여기 설마 쵸로마츠 방?"
"-지금은. 아.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이 방 원래는 형 방이었어?"

오소마츠는 팔을 추욱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그랬지." 그와 동시에 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눈앞의 동생을 콱 쥐어박고 싶으면서도, 멱살을 잡아당겨 단박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오소마츠는 잠시 고민하다 그냥 침대에 몸을 맡겼다. 지금 상황에서 입술을 가까이한다니, 말도 안 되지. 그것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던가? 또 그것들과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던가? 오소마츠는 멍한 정신으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회상했다. 손가락을 까닥인다. 손마디는 문제없이 잘 꺾였다. 그렇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또 모르지-.. 오소마츠는 창밖을 살폈다. 얼마 안 지나면 밤이었다.

"어디 갈 생각은 하지 마. 지금 형 다리에 총 맞았으니까."
"이러려고 쏜 거야? 무섭네, 삼남-. 원래 얀데레였던가?"
"네가 그렇게 만든 거겠지."

오소마츠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끄덕였다. 언뜻 자조가 섞인 듯한 그 웃음이 쵸로마츠의 심기를 긁었다.



22. 가슴 한쪽이 쿡쿡 찔리듯 아팠다. 죽은 줄로만 안 형이 살아 돌아온 것은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건만, 카라마츠는 제 형이 방 밖으로 나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표정을 지어내는 것은 자신 있다고 여겼는데도 도저히 기쁜 척을 못 할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는 한 가닥 원망마저 맴돌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예를 들면, 그와 함께 살 때라던가.. 그렇지만 카라마츠는 그때도 오소마츠를 기꺼이 여기진 않았다..

"아, 카라마츠네."

그는 제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느꼈다.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답답해지고, 입꼬리가 굳고, 당장이라도 소리 내지를 듯 목이 뻣뻣해졌다. 태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그는 혹시 지금 자신이 다녀온 것이 1박 2일짜리 단기여행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카라마츠는 제법 합당한 의심이라고 자기 합리화했다. 그야, 그렇지 않고서는 말이 안 되지 않나. 저토록 아무렇지 않단 태도가, 아니, 그는 절대로 오소마츠를 이해할 수가..

-2년은 족히 나 몰라라 했으면서!

그러자 카라마츠는 제 원망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오소마츠에게, 저와 동생들은 '방치' 한 것을 책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듯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오소마츠가 툭 하고 어깨를 건드리는데도 화가 나지 않았다. 내일모레 30살 다 돼가는 성인 남성 다섯이 누군가에게 '보살핌' 받으며 사는 것이 어디 떳떳한 일인가? 그것도, 상대는 저 마츠노 오소마츠인데-..

오소마츠는 고개를 숙인 채 줄곧 말이 없는 카라마츠를 살피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왜. 많이 화났어? 역시 그렇지~. 나, 비행청소년 역할에 좀 심취해서, 너무 오래 나가 있었지."
"..비행청소년이라기엔 너무 늙지 않았나."
"얼굴은 나름 청소년 같지 않아?"
"웃기는군."

그 말을 기점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던 시시콜콜한 대화가 잠시 끊겼다. 창문 밖 해는 지평선 위로 귀퉁이 한쪽만 내보인 채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것들의 발소리가 하나, 둘, 시작될 때쯤에야 오소마츠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열심히 했네, 카라마츠."
"..."
"이제 형아, 돌아왔으니까 이만 내려와."

카라마츠는 침묵을 지켰다. 맏형 자리가 아쉬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없는 2년간 줄곧 바라온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카라마츠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망설였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가장 크게 들리는 물음은 그것이었다.

내려오라니, 여기서 더?



23. 계단을 타고 길게 늘어진 옅은 그림자는 제 맏형의 것이 분명했다. 은은한 달빛에도 눈이 부셔 늘 닫고 살던 문을 활짝 연 토도마츠에게는 그것이 아주 잘 보였다. 혐오스러운 그것들의 숨소리도, 질퍽이는 발소리도, 밤이라는 시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마저도 싫어서 문을 안 닫고는 견딜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닫혀있는 문이 유독 답답해 보여 연 것이었다. 까닥, 까닥, 그림자의 발끝이 흔들렸다. 침묵과 무료함을 싫어라하는 오소마츠는 밤마다 저렇게 다리를 흔들고는 했다.

2년 전의 토도마츠는 잠에 들기 전, 그 흐릿한 그림자의 끄트머리를 보며 시간을 때우고는 했었다. 그것 때문에 늘 현관과 가장 가까운 방을 차지하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렸다. 뭐, 형이 사라진 후부터는 의미 없는 고집이 돼버렸지만. 밤에 그의 방문이 굳게 닫히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그가 어쩔 수 없이 빛없는 밤에 익숙해져야 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제부터는 다시 이런 느긋한 밤이 계속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들뜨다가도, 갑작스레 착 가라앉았다. 느긋하게 라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느긋하게 살 수 있단건데? 그렇지만 2년 전의 그는 그렇게 살았었다.

'이렇게 지내도 되는 걸까?'

문득, 스쳐 지나가는 것은 셋째 형의 목소리였다.

'응? 뭐가?'
'아니, 오소마츠 형 말이야. 거의 자지도 않고, 계속 뭔갈 하고 있잖아.'
'뭐-, 일이 싫은 니트도 할 때는 한다는 거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쉴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그렇긴 한데, 우린 잠은 제대로 자고 있고. 지금도 봐. 트럼프하고 있잖아.'
'뭐.. 형은 총 같은 걸 못 만지게 하는 것도 있고.. 아니, 형도 똑같이 놀고 있잖아?!'
'그야, 물론 나도 뭐라 할 입장은 아니긴 한데.. 계속 이렇게 지내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이게 왜 지금 생각나는 거야, 기분 나쁘게. 토도마츠는 꿈틀꿈틀 침대 끝으로 도망치듯 자리를 옮겼다. 오소마츠가 사라지기 전은 분명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적어도 피가 터지도록 서로 싸우는 일은 없었고, 그것들에게서 쫓겨 달아날 일도 손에 꼽는, 문제없는 나날들. 그렇지만 그것들이 만연한 이 세계에서 문제가 없는 날은 있을 수 없었다. 토도마츠는 그것을 2년 동안 뼈저리게 알았다. 그래서 더욱 그가 그리웠다. 오소마츠가 있었던 때의 그 이상하리만치 평안한 시간이, 사무치도록. 그래, 그래.. 이상하리만치 평안했던-..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달빛이 비친 희멀건 벽면에 그림자 하나가 더 그려졌다. 계단의 손잡이를 잡은 손목에는 하얀 셔츠 소매가 살짝 엿보였다. 토도마츠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오랜 상념의 시간 동안 피해왔던 한 문장을 끝내 머리에서 완성해냈다.

혹시, 오소마츠 형은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너무 그럴 듯하잖아. 입을 열면 울음 섞인 숨이 흐를 것 같아 그는 입을 꼭 다물었다.



24. 오소마츠는 멍하니 창틀에 걸터앉아 내린 블라인드 사이를 그것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쵸로마츠는 소음기가 권총 끝에 제대로 들어갔는지를 더듬거리며 살폈다. 조금 소리는 나겠지. 그렇지만 주변에 있는 그것 하나가 기웃거리는 정도가 다일 것이다. 가슴이 두근두근 요동치며 피를 온몸에 보냈다. 그런데도 손끝은 차가웠다.

내 발소리를 들었잖아. 일부러 크게 내면서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쵸로마츠는 초조하게 숨을 내쉬었다. 한숨이나 다름없었다. 들리지 않을 리가 없는데 그는 여전히 창문 너머로 시선을 둔 채 미동도 없었다. 쵸로마츠는 당장이라도 오소마츠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봐주기를 바랐다. 권총의 방아쇠에 천천히 손가락을 건다.

쵸로마츠는 언뜻 그날 같다고 여겼다. 그가 평생 같던 60초를 문밖에서 있다가 돌아온 날 같다고. 그가 자신을 외면하며 애태운 그 날과 아주 똑같은 감각이었다. 그렇다면 네가 곧 이쪽을 바라보는 걸까, 잠시 멍때린 것뿐이야, 하고 안심하란 듯 말하며. 왜 그런 표정이냐고 장난스럽게 물으며. 한발 늦게 내게 다가오며.

-또 믿음을 주고, 멋대로 행동할 생각으로.

"오소마츠."

흠칫, 하며 돌아본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먼저 부를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 쵸로마츠는 그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다리를 움직였다. 들고 온 권총을 창틀 위에 가만히 내려놓는다. 급했다. 알고 있었다. 이렇게 단박에 해결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원래 참을성이 많은 성격이 아니어서.

"뭐, 뭐야? 삼남?"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이 새끼가 어디로도 못 도망치게 잡아두려면 무슨 협박을 해야 하지? 다리에 총알을 박아두어도, 수갑으로 묶어두어도, 방 안에 가둬두어도 그는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나가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부탁한다면 자신은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쵸로마츠는 시리게 차가운 창문에 손바닥을 붙이며 생각했다. 떠날 수 없게. 떠날 생각도 못 하게.. 머리가 아팠다. 그런 거, 알 리가 없잖아. 이 새끼는 뭐든 지 마음대로 하는 놈이라고.

그래서, 그는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가지 마."

깊은 무력감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원망마저 느껴졌다.

"일을 하든 먹고 놀든 상관없으니까,"

목소리에 섞인 물기가 수치스러웠다. 말을 멈추고 싶은데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여기에 있어. 제발.."

숨이 막히도록 깊게 끌어안긴 오소마츠는 필사적으로 울음을 죽이는 동생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미지근한 눈물이 옷에 투둑,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25. 네가 그렇게 진심으로 부탁하는데, 내가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잖아.



26. "오소마츠 형아, 잘 잤슴까?"
"오, 쥬시마츠! 일찍 일어났네!"

쥬시마츠는 신난 걸음으로 제 형에게 다가갔다. 절로 걸음이 통통 뛰었다. 그가 반겨주는 아침이 얼마 만인지. 쥬시마츠는 눈앞의 형을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에 팔을 번쩍 벌리고 다가섰다. 오소마츠가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며 주춤했다. -왜? 쥬시마츠는 그제서야 오소마츠가 기억 속과 다르게 바닥에 주저앉아 있단 것을 알아챘다. 눈을 데구륵 굴려 아래를 살핀다.

"-쵸로마츠 형아?"
"안 졸린다면서 오더니. 여기서 자버리더라고."
"으응.."

오소마츠의 배에 얼굴을 반쯤 묻은 쵸로마츠는 세상모르고 곤히 잠들어있었다. 쥬시마츠는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물끄러미 오소마츠와 눈을 마주했다. 오소마츠는 난처하게 웃으며 물었다. "왜?"

"있지, 오소마츠 형."
"응?"
"이제 어디 안 갈 거지?"

확신이 가득 찬 어조였다. 대답을 알면서 꼭 물어본다니까. 빙긋 호선을 그린 오남의 웃음에서 불안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오소마츠는 제 손을 단단히 붙잡은 쵸로마츠의 손을 꼭 쥐었다. 따스했다. 살며시 감긴 눈 주변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야지. 형아 없으면 우리 삼남, 말라 죽을지도 모르잖아?"

쥬시마츠는 부정하는 말 없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웃었다. 그의 셋째 형은 협박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